고슴도치 마냥 한 곳에 참 오래 살았다. 움직이지 않는 붙박이 나무가 아닌가 할 때도 가끔 있었다. 고향 같은 그곳을 떠나 먼 곳에 둥지를 튼 지 벌써 반년이 넘어간다. 모든 게 몸에 배지 않은 생소한 곳, 코로나바이러스까지 얹힌 시절에 내 삶은 외계인처럼 되고 말았다.
지루한 일상에 맞서 무언가 하고 싶으면 뒷마당으로 나간다. 뒤뜰에서 일하다 보면 조그마한 재미를 느낀다. 일하며 한 번은 벌에 쏘이고 두 번은 불개미에 물려 고생 톡톡히 했다. 처마 위 벌집을 끌어내다 벌에 쏘였을 땐 오히려 미안한 느낌이었지만 호미질하다 보이지 않는 땅 속의 불개미 집을 건드려 개미가 물었을 땐 억울했다.
오래 전, 캐나다 밴쿠버에 한 이 주간 머문 적이 있다. 그 도시엔 여행자 못지않게 노숙자도 많았다. 번화한 길가의 높은 건물 밑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찌그러진 양재기에 밥, 김치, 멸치짠지를 섞어 먹던 한인 노숙자도 보았다. 더러운 얼굴에 낡은 옷을 걸친 그 앞에 동전 깡통이 놓여있었다. 값싼 동정심이고 별 도움이 안 되는 줄 알지만 그냥 지나치기가 뭐해 깡통에 1달러 넣고 돌아섰다.
집은 삶과 존재의 공간이다. 몸과 마음의 휴식처요 안식처다. 동물에게 집은 곧 생존의 공간이어서 누가 침범하면 목숨 걸고 달려든다. 인간은 다르다. 각자의 사정과 취향에 따라 어떤 사람은 집이 크고 웅장해야 편하고 만족한다. 다른 이는 조그마한 집이 마음에 든다. 또 어떤 이는 이러이러한 집에 살기를 바라는데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 그냥 눌러 산다. 최근 들어 점점 큰 집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늘어나고 있다. 마치 종교적 신념처럼 심하게 굳어져 간다. 돈도 되고 사회신분 상승의 나침표도 되기 때문이다. 많은 현대인이 집에 포로로 잡힌 채 살고 있는 이유다.
마땅히 거주할 집이 없는 사람을 노숙자라 부른다. 대부분의 노숙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빈곤한 계층에 속한다. 경제적 이유로 거리로 내몰리거나 약물과 알코올 중독자, 정신병 환자, 성학대 피해자, 가출 청소년 등이 주류를 이룬다. 최근 정신병원 수는 적어지고 사회복지 정책은 후퇴하고, 과열되는 도시화로 정신병자 노숙자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이제 지역사회 문제를 넘어 국가적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의사 생활 90% 이상을 큰 정신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했다. 그러다보니 노숙자 정신병 환자들을 참 많이 만났다. 그 중 기억나는 환자 이야기다.
50대 중년남자였다. 어느 날 갑자기 정상적 삶의 궤도를 벗어나 가정과 집을 떠나 길거리 사람이 되었다. 그는 셸터와 보호소는 절대 이용하지 않고 주로 폐허가 된 빈집이나 시내 공원에서 지냈다. 비오는 어느 날 저녁 공원에서 주거하는 노숙자들을 단속하던 경찰과 시비가 붙어 말썽을 부리자 정신병원으로 끌려왔다. 왜 길거리 사람이 되었냐고 물으니 자기보다 못난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 싫어서라고 했다. 그가 가장이자 직장인이었을 때 항상 자신이 옳다는 주장만 내세우고 살았다. 누가 자신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면 입에 거품을 물며 대들었다. 사람들이 자기보고 사이코라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다 사이코라고 반박했다.
텅 빈 눈으로 동전 깡통만 바라보던 갈 길 잃은 거지 모습의 밴쿠버 한인 노숙자, 병적 자애 성격자로 자신에 도취되어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거리를 택한 시카고 노숙자의 당당함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또한 순식간에 거처를 잃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 옛 자기 집을 맴돌고 있던 벌과 개미들의 환상도 보였다. 그렇다면 거의 반세기를 몸 담아온 미국 땅에서 정을 붙이지 못하고 아직도 마음은 먼 한국으로 향하고 있는 나는 뭘까?
진짜 이방인은 거주 공간은 물론 마음 공간까지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물신주의에 빠져 경쟁과 비교에 목숨 걸고 허우적거리는 현대의 젊은이들, 거의 반세기를 살고도 미국 땅에 정 붙이지 못하고 마음이 한국으로 향하고 있는 나도 그렇다.
이제 새해다. 벌, 개미, 노숙자, 나 자신 그리고 코로나에 갇혀버린 현대인 모두가 미래도, 현재도 관심 밖의 무감각 속에 묻어버리고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까뮈의 ‘이방인’들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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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