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뉴욕에 5년 만에 최대치라는 폭설이 내린 다음날 새벽, 온 세계가 고요했다. 키 큰 나무에 흰 눈이 쌓여 가지가 부러질 듯 하고 눈을 가득 머리위에 인 낮은 지붕들, 인적은 없고… 추사 김정희의 문인화 ‘세한도’(歲寒圖)가 떠오르는 설경이었다.
조선 최고의 명필 김정희(1786~1856)는 헌종 즉위초인 1840년 안동 김씨 세력이 뒤집어씌운 대역죄로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1848년까지 지냈다. 세한도는 1844년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당시, 나이 59세 때 그린 그림이다. (참고로 이 그림은 국보 180호로 올해 초 실업가 출신 손창근 선생이 국가에 기증, 온 국민이 보고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제주도 유배형은 가장 무거운 위리안치형으로 집을 가시울타리로 둘러싸 집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김정희는 이곳에서 풍토병에 시달리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면서 많은 글과 작품을 남겼다.
그가 유배를 가자 모든 이들이 불이익을 받을까 인연을 끊었지만 제자였던 통역관 이상적(1804~1865)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김정희에게 역관 일로 청나라에 다녀올 때마다 책을 전해주고 최신학문과 동정을 알려주었다. 조선시대 역관은 대를 이어 그 직업을 세습했는데 이상적 집안은 역관을 뽑는 역과(譯科)에 합격한 자가 9대에 걸쳐 30명에 달할 정도였다.
김정희는 그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1년 중 가장 추운 날, 세한을 그린 그림을 이상적에게 주었다. 세한도 밑으로 찍힌 인장의 글씨는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잊지 말자는 뜻이다. 절망과 절대고독 속에 참 벗을 그리는 마음, 진짜 벗을 지닌 그는 마음은 빈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은 단순하다. 단 하나의 둥근 창문이 있는 초가 한 채를 중심으로 잣나무와 소나무가 네 그루 나란히 서있을 뿐 배경도 사람도 없이 텅 비어있다. 이 간략한 묘사가 대쪽 같은 성품, 선비의 기개와 의리를 보여준다.
당시는 활자가 없으니 모든 책이 필사본이었다. 그러니 책 한권 가격이 어마어마한 고가였을 터, 세한도 재발문 중에서 제자 이상적에게 쓴 글이 있다.
“작년에는 만학집과 대운산방 문고 두 책을 보내주더니 올해는 또 황조경세문편을 보내주었다.”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했네. 그대가 나를 대함이 귀양 오기 전이나 후나 변함이 없으니 그대는 공자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은가.”
올 봄부터 코로나19가 퍼지면서 봉쇄령이 내려졌다 풀렸다, 다시 자택대피 행정명령에 장기간의 재택근무까지, 우리는 멀리 사는 가족은 물론 친구도 만날 수 없다. 그저 같은 집에 사는 가족과 교류할 뿐 사회생활의 통로는 막혀 버렸다. 14일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지만 일반서민들에게는 내년 2월이 되어서야 백신 차례가 올 것이라고 한다.
길고긴 코로나 대피상황에서 우리는 지쳤고 외롭다.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면 코로나 팬데믹이 가져온 고립생활 속 우리 모습 같다.
그래도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시절에 커다란 업적을 이뤘다.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고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추사체를 만들었다. 금석(비석)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하는 금석학을 익혔다. 그리하여 북한산 비석이 바로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다.
우리는 깊이를 모르는 동굴, 탈출구 없는 우물,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은 고립생활을 언제 벗어날지 모르지만 그래도 바깥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폭설과 강풍이 아직 한창이라 해도 우리에겐 ‘이상적’ 같은 벗 하나만 있으면 된다. 지위, 권력, 아무 것도 없는 김정희에게 이상적은 진실한 벗 그 이상이었다. 뼈가 시린 혹한도 잊게 만든 따뜻한 우정이었다. 내 곁에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상적’ 같은 벗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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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뉴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