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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클래식] 크리스마스와 ‘호두까기 인형’

2020-12-25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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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는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을 들으면서 지냈다. 보통 이맘때는 ‘호두까기 인형’을 보러 가곤 했었는데 올해는 사정이 사정이다보니 듣는 즐거움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호두까기 인형’을 보지 않고 듣기만 하는 느낌은 어떨까? 조금 답답할 것 같지만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하는 맛이 쏠쏠하다. 아니 한층 더 새로운 맛이라고나 할까, 마치 차이코프스키의 영혼이 춤을 추는 듯한 감동으로 와 닿는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저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창출한 수 있었던 차이코프스키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음악 속에서 등장한 차이코프스키는 재치 있고 공상을 좋아하는 귀공자로 비친다. 실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실존하지 않는, 음악의 세계에서 날아온 요정같다고나할까. 요정이 터치하는 곳곳마다 마술처럼 아름다운 무지개가 피어나곤 하지만 정작 요정 자신은 갈 곳이 없어 쓸쓸히 낙엽을 맞으면서 외로움에 떠는 모습이 안타깝다. 찬란한 춤 곡 가운데서도 차이코프스키의 고독이 진하게 묻어나는 음악…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남기고 이듬해에 사망하게 되는데, 그래서일까 이 곡은 마치 작별을 앞둔 지상에서의 마지막 잔치와 같은 별세계의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이 크리스마스 발레로 굳어진 것은 불과 반세기 전의 일이었다. 1944년, 베이지역의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 작품을 공연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처음부터 크리스마스 발레를 위한 기획이 아니었고 오페라 하우스를 빌려쓰다보니 공연장이 비는 비성수기가 크리스마스 시즌뿐이어서 이 작품을 공연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당시 SF 발레단은 SF 오페라에서 독립한 지 얼마 안 되어 재정적인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근처의 폐관된 극장에서 커튼을 뜯어다 제작한 의상 등으로 간신히 막을 연 이 작품은 크리스마스 시즌이 오히려 안성맞춤이었던 시기적인 타이밍 때문에 대박을 터트리게 되는데 말 그대로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1964년 TV 방송국 ABC의 전파까지 타면서 전 미주는 물론 전 세계적인 크리스마스 공연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어찌보면 ‘호두까기 인형’이야말로 그 어떤 작품보다도 크리스마스 때문에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크리스마스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작품이기도 했다. 전혀 의도치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치 크리스마스를 위한, 크리스마스에 의한, 크리스마스의 작품이 되어버린 경우라고나 할까.

호두까기 인형은 15세기때부터 이미 독일 지방에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제작되고 있었는데 이 호두까기 인형을 주제로 1816년 호프만이라는 작가가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대왕’이라는 제목으로 동화를 출판한 것이 오늘날의 ‘호두까기 인형’의 내용이다. 189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극장으로부터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차이코프스키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첫 이유는 ‘호두까기 인형’에 대한 악상이 전혀 떠오르지 않은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차이코프스키의 친구이자 재정적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과의 결별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헤어짐으로 깊은 실의에 빠져있던 차이코프스키는 작곡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미국 여행을 결심하게 되는데 이것이 오히려 ‘호두까기 인형’이 탄생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미국 여행을 위해 파리에 들렀던 차이코프스키는 그곳에서 신기한 악기를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트라이앵글처럼 투명한 소리를 내는 첼레스타라는 악기가 그것이었다. 작곡가로서 새로운 악기에 대한 호기심을 느낀 차이코프스키는 이 악기를 활용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생겼고 결국 첼레스타는 ‘호두까기 인형’ 중 ‘사탕 요정의 춤’ 등에서 크게 활약하는 악기로 등장하게 된다. 차이코프스키는 또 프랑스에서 사랑하던 누이 샤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게되는 데 샤샤에게는 ‘타티아나’라고 하는 딸이 하나 있었다. 홀로 남겨진 조카에 대한 강한 연민의 감정이 일었던 차이코프스키는 갑작스러운 영감에 사로잡혀 어린 클라라를 타티아나로, 또 그 자신을 클라라에게 호두까기 인형을 전해 주는 학자 드로셀메이어로 대입 시켜 작곡의 틀을 완성하게 된다.


단순히 흩어진 마음을 추스르겠다는 이유였지만 이 여행에서 차이코프스키는 ‘호두까기 인형’이라는 발레 역사상의 새 금자탑을 세우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데 1892년에 열린 초연 무대는 허술한 무대, 무용수들의 서투른 춤 등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음악만큼은 호평받았다. 특히 첼레스타를 비롯해 장난감 북, 장난감 나팔, 여성합창 등을 삽입한 파격적인 편성의 모음곡이 크게 인기를 얻었고 나중에 발레로서 빛을 보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1944년 SF 발레가 차이코프스키의 사후에 안겨준 크리스마스 선물이 그것이었다.

늘 우울한 성격이었던 차이코프스키는 ‘호두까기 인형’ 발표 후 이듬해에 자녀도 가족도 애인도 없는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비창’ 등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 작곡가로서 또 ‘백조의 호수’와 같은 가장 우아한 발레 음악의 대명사로서 음악사를 업그레이드시켰던 차이코프스키에게 있어서 말년에 찾아온 ‘호두까기 인형’이야말로 어쩌면 그의 외로운 삶에 있어서 유일한 희망의 새소리… 작곡가 자신을 위한 영혼의 절규였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뭇 사람들의 가슴에 울리는, 한편의 크리스마스 소묘로서 인류의 연말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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