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일마냥 붙박이는 아니지만 개개인 나름대로 연중일정들이 있겠다. 나도 ‘연정표’ 인양 ‘고추추수’로 가을을 마감한다. ‘할머니표 손맛’ 음식 중 하나인 고춧잎나물을 좋아해서다.
절친 Y가 늦가을만 되면 서리 맞기 전에 빨리 텃밭고추를 뽑아가라고 종용하고 나는 날을 잡아 친구네 고추나무를 싹쓸이해온다. 오늘도 이렇게 따스한 가을볕에 앉아 고춧잎을 하나하나 따고 있다. 양지바른 뜰에 앉아 고추손질을 하시던 할머니를 회상하면서…
무심코 꽃을 들여다봤다. 그러고 보니 하도 작고 꽃 같지 않아선지 눈길을 줘본 기억이 없다. 애기손톱만 한데 흰색도 아니고 미색도 아닌 타원형의 꽃잎이 5장이다. 가운데는 연한 라벤더 색 꽃술이 클로버 꽃처럼 소복하다. 하찮게 봤던 꽃인데 참 예쁘다. 사람들의 관심 밖인 소박하고 순연한 이 작은 꽃! 그런데도 맛과 영양이 뛰어난 열매를 잉태한다는 사실이 새삼 신비롭다. 더한 건 이렇게 맛난 잎까지도 아낌없이 내준다 싶으니 더없이 고맙다.
만약 지구상에 고추가 없었다면? 한민족에겐 치명타겠다. 김치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보기 힘든 빨강이 주색인 한국요리는, 그야말로 초상집 격 아닐까! 한국대표 음식주자인 비빔밥엔 화룡점정이고, 영조가 송이, 전복, 어린 꿩과 함께 특 반찬으로 꼽았다는 고추장은 탄생조차 못했을 터.
더구나 비타민 C의 함량은 사과의 10배가 넘고, 풍부한 캡사이신으로 신체적 효력과 질병 예방에도 탁월하단다. 가히 만병통치 수준의 성분이다. 해독작용도 있어 장 담글 때면, 맛을 나쁘게 하는 이물질 제거와 보존성을 높이려고 고추를 넣었다.
또 하나, 금줄이라고 아들이 태어나면 새끼줄에 고추와 숯, 딸이면 숯과 솔가지를 꿰어 대문에 걸었다. 해로운 세균의 접근방지와 애기가 내내 건강하기를 기원하는, 실리적이자 해학적인 습속이다. 또 감기엔 감주나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서 마셨던 민간요법도 있고. 이처럼 한국의 식문화와 풍습에 관여된 비중으로 치면, 좋다는 마늘보다도 유익성에선 서열이 높겠다.
그런 소중한 고추의 원산지는 멕시코다. 컬럼버스가 스페인에 유포하려다 실패한 후, 브라질의 어느 포르투갈인이 유럽으로 전파, 세계음식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단다.
고추는 서로 다른 품종끼리도 바람으로 수정, 쉽게 교잡종을 만든다. 해서 불어로 피망(Piment), 독어로 파프리카(Paprika), 영어론 Bell(Sweet) Pepper라 부르는, 세계적으로 두루 사랑 받는 종자도 파생된 것. 한국에선 그 외에도 고추가 무려 100여종이나 된단다.
병충해엔 약해 고추농사엔 대략 10번 정도 농약을 친다나. 그런데 친구는 오로지 사랑과 정성, 물, 깻묵 비료로만 키웠으니 100%유기농이다. 그런 ‘건강고춧잎’을 다람쥐가 겨울양식을 쟁여놓듯 푸짐하게 따서 데쳐놓았다. 늘 내게 연중행사로 즐거운 노동과 기쁨을 안겨주는 친구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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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숙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