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고장난 시계

2020-12-05 (토) 최동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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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너머의 하늘을 반 쯤 가리고 있던 도토리 나무가 무사히 한 해를 마쳤다며 여름 내내 숨겨 두었던 하늘을 보여 주었다. 그동안 서재의 작은 창문으로도 그렇게 크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푸르고 맑은 하늘을 보며 교회의 종탑이 이고 있던 쪽 빛 하늘이 생각났고 어디선가 교회 종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바람 소리를 들려주던 앞 산과 숲으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들풀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른 봄에 아내와 함께 심었던 어린 장미마저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채 부처 마냥 돌아앉은 모습을 보며 이제 계절이 바뀌었음을 받아 들인다. 제법 바람이 부는 오후였지만 강둑을 천천히 걸으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으나 마음을 추수리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빈 숲은 근처의 다른 빈 숲과 만나고 다시 나즈막한 언덕을 따라 먼 산으로 이어졌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쏟아 낼 듯 잔뜩 찌푸리고 있었지만 잿빛 하늘은 저녁이 될 때 까지 침묵했다. 어둠은 여느 다른 날 보다 한 시간 쯤 일찍 내려 앉았고, 그렇게 흐린 하루가 무겁게 저물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져 가는데도 여전히 눈은 오지 않았다. 때이른 눈 소식을 기대했던 탓인지, 아니면 늦은 저녁에 마신 커피 한 잔이 잠을 방해 했는지 불분명 했지만 어둠 속에서 창 밖으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불면의 밤을 이겨내고 있었다.

순간, 휴대폰의 기계음이 어둠을 깊게 베어내며 울렸다. 소리는 섬뜻했고, 진동 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불안한 마음도 덩달아 흔들렸다. 내가 단체방에 초대 되었음을 알았고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머리속을 스쳤다. 예상치 못한 이의 느닷없는 부고는 참으로 허허로운 일이었다. 사순을 준비 없이 맞았을 때 처럼, 삶이 눈물겨움을 깨닫던 때 처럼, 아니 계절이 경계를 넘어 저만치 떠났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 처럼 허망했다. 부고가 주는 슬픔과 그것을 방어 하려는 마음은 날줄과 씨줄로 엮여 퇴색되어 가던 기억위에 선명한 색을 입히며 떠올랐다.


유년시절에는 모든것이 천천히 지나 갔었다. 안방에 걸린 궤종시계는 언제나 처럼 오후 3시에 머물러 있었고, 멀리 보이는 비행기의 움직임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파란 하늘의 구름은 늘 그자리에 그림처럼 떠있었고, 바람조차 숨죽이고 지나가는지 나무잎을 흔들지 못했다. 그런 나뭇잎을 바라보며 잠들곤 했던 그 시절의 오후 3시는 시간이 변해도 늘 기억의 언저리에 머물렀다. 잠을 자고나면 엄마가 온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소년 스스로 일부러 잠을 청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 시절의 어린 소년에게 제일 무서운 사람은 할아버지 였지만 할아버지 보다 무서운 존재는 5일마다 동네를 찾아 오던 엿장수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고 했는데 자신의 희생으로 너희들이 살고 있는거라며 자신의 다리를 내 놓으라고 가는 사람을 붙잡고 윽박지르곤 했다. 순경들도 그 아저씨만은 어쩌지 못하고 어른 모시듯 대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 아저씨에도 무서운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우리 엄마였다. 동네 한가운데서 아저씨의 고성이 들리면 엄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엿장수 아저씨에게 갔다. 그리고 주위의 소란스러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엿 판의 절반 쯤을 사서 돌아왔다. 쉰 막걸리 냄새가 나는 아저씨도 그 즈음에는 엄마를 향해 거듭 고개를 숙이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산 엿은 우리 형제들을 포함한 열명 남짓한 동네 아이들의 몫이었다.

전쟁이 끝난지 몇 해가 지나지 않은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했고, 살림살이의 남루함이 부끄럽지 않던 시절이었다. 동네 어귀로 어둠이 내리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났는지 내 또래로 보이는 서 너명의 아이들과 나보다 한 뼘쯤 커보이는 깡 마른 사내가 골목길을 돌며 각설이 타령을 부르곤 했었다. 해학적인 가사나 몸짓은 듣는 이에게는 재미가 있었으나 부르는 이들의 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들은 몰려 다니며 밥을 얻으려 했으나 그것도 굳게 닫힌 대문 앞에서 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지금의 나 보다 한참은 더 젊었던 엄마는 ‘식은 밥은 내가 먹어도 된다’ 며 갓 지어낸 더운 밥을 담아 내어주곤 했었다. 그 거지 무리들 중에 늘 내 눈길을 끌었던 나 보다 작은 여자 아이가 있었다. 옷은 해지고 더러웠으나 유난히 큰 눈을 가진 아이였는데 배고픔 보다 부끄러움을 감추려 무리들 뒤에 숨어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사내 뒤로 숨으며 수줍게 웃던 아이의 웃음이 기억난다. 7살 어린 소년의 눈에도 안쓰러웠던 그 아이가 지금 어디쯤의 길 위에 서 있는지 궁금하다. 기억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이런 오래된 기억들은 놓치고 싶지 않다.

햇빛이 따뜻하던 주말 오후, 좁은 골목 길에서 자전거를 타던 옆집 어린 형제를 불렀다. 할머니에 맡겨져 일 하러 나간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들을 보며 엄마를 기다리다 잠이 들던 유년 시절이 생각났다. 그들과 서툰 포커 게임을 했고 내가 번번히 졌다. 아내가 빵을 구워 내왔고, 그들이 내내 웃었고, 나도 그들을 따라 웃었다. 오늘, 나는 이렇게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들여 놓는다.

<최동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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