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위지지 불지위불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앎이다.”
이것은 2,500년전 인류사의 초창기 공자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을 한마디 21세기어로 바꾸면 ‘메타인지’이다. 메타인지는 인공지능은 할 수 없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인지능력으로 간주된다.
메타인지는 1984년 발달심리학자 존 플라벨의 조어로 학생들의 학습 능력을 키우기 위하여 도입된 개념이다. 메타인지(metacognition)는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능력이다. 웹스터 사전에는 ‘자신의 학습과 생각의 과정을 분석하는 능력’이라고 되어있다. 이런 의미에서 메타인지를 ‘상위인지(higher-order thinking skill)’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의 한 대학에서 메타인지 실험을 했다.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 그룹과 보통인 학생 그룹으로 나누고 기억력 시험을 보게 했다. 두 그룹에서의 성적은 비슷했다. 그러나 실험에서 나타난 놀라운 발견은 상위권 그룹의 학생들은 자신이 몇개 틀렸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다른 그룹은 그렇지 않았다. 이 말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에게는 메타인지가 발달되어있었음을 말해준다.
인간의 학습과 인공지능의 학습은 다르다. 인공지능은 다층의 서킷을 통해 수리적으로 배운다.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더 배워서 자신의 성능을 스스로 빠르게 개선해간다. 인간의 배움은 몸과 마음 전체이다. 우리 몸의 생리적 현상, 무의식, 환경, 선험적인 지식, 경험, 감정 등과 함께 오감을 통하여 들어온 정보를 뇌 속의 시냅스라는 뇌세포 연결 활동을 통하여 학습한다. 인공지능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기 위하여 모든 서킷을 다 돌려보아야 한다. 인공지능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며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미치는 지에 대해서도 모른다.
메타인지를 높이기 위한 효과적인 학습방법으로 유대인들이 경전을 가르치기 위한 전통적 학습방법 ‘하브라타’를 예로 든다. 뉴욕의 유대인대학 예시바대학에서의 학습방법도 하브루타이다. 누구하고든 1대1로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배우는 방법이다. 큰 소리로 자신의 이해한 바를 상대에게 설명하면 상대방은 질문을 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면 모르는 것이다.
상대도 그렇게 서로 주고받으면서 두 사람이 완전히 이해해서 공동의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한다. 손짓발짓으로 큰 소리로 자유롭게 설명하라고 권장한다. 그래서 예시바대학의 도서관은 엄청 시끄럽다. 하브라타는 모르는 것을 찾아내는 메타인지를 발달시키는 훈련이다. 이 방법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대인이 사회전반에서 우수한 인재를 내게 한 요소가 된 것으로 믿어진다.
메타인지를 발달시키는 방법 중에 다른 예로는 성찰의 방법도 있다. “내 못난 줄 알 때 비로소 철나는 때이다/ 나이 팔십이 넘어도 내 잘난 것이 있으면 아직 철이 안 난 것이다/... 내 못난 줄 알고 내 모르는 줄 알고서 일체를 여불로 섬기게 될 때 참으로 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가장 낮은 곳은 자연히 대해(大海)가 되지 않는가” 성철 스님의 ‘수도팔계’ 중에 ‘하심(下心)’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인간은 2차 산업혁명으로 근육노동을 기계에게 빼앗겼다. 이제 의사, 변호사, 회계사 등의 고도의 지적노동도 인공지능에게 빼앗기게 된다. 인간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고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감정이 노동하는 ‘고위인지’인 메타인지, 즉 ‘자기성찰’이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인지활동인 듯하다. 메타인지와 더불어 혼잡한 전체 속에서 원리를 꿰뚫어 끌어낼 수 있는 통찰력, 인공지능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도덕성과 따뜻한 마음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시대로 우리는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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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시납스 인터내셔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