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테스 형은 알까?

2020-11-28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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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중순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날씨가 온화하고 청명하다. 동네 숲에 수북하게 쌓인 낙엽 사이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으깨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도토리가 지천이다. 다람쥐가 겨우내 먹고도 남을 것 같아 아깝다는 생각에 도토리묵 생각이 절로 난다. 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보고 먹을거리를 떠올리는 것은 서양사람들과는 나누기 어려운 우리만의 정서가 아닐까.

산책로를 걷는데 나뭇가지 끝에 잎눈과 꽃눈이 봉긋하게 돋는 게 보인다. 곧 추위가 몰아칠 텐데 어쩌나 싶다. 날씨가 포근해서 봄인 줄 알고 고개를 내민 것 같아 눈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세상이 어수선하니 나무도 철을 모르는지.

1차 2차 팬데믹 사태로 인간의 삶에도 이미 많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당연히 누리던 것들이 더는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아프게 알아가고 있다. 얼굴 마주 보고 앉아 차 마시며 이야기 나누고, 반갑다며 악수하고, 위로하며 어깨 토닥이고, 헤어지며 부둥켜안던 시간이 언제였나 싶게 아스라이 멀리 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뛰놀던 시간도, 명절이면 떨어져 지내던 가족이 모두 모이던 시간도 영상 속에서나 움직일 뿐이다.


바이러스가 아무리 무섭다 해도, 웬만큼 그러다 말겠지 했다. 백신에 기대를 걸고 잠시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백여 개 기업에서 개발을 시작했다는데 부작용이나 면역력 생성 등을 고려할 때 일반화시키기엔 10개월이 지난 지금도 아직 이른 상황인 듯하다. 강물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없듯이 한번 시작된 흐름은 거역할 수 없는가.

이제 인정하고 적응하는 방법밖에 없지 않을까. 위기에 직면했을 때 택할 수 있는 방법 중에는 맞서거나 회피하거나 적응하는 길이 있다. 맞서기에는 역부족이고 피한다고 될 일도 아니니 각 분야의 전문가들 조언을 듣지 않아도 적응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집에 머무는 데 익숙해지는 게 최상의 방편인 줄 알면서도 10개월이라는 기간은 너무 길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서서히 지쳐갔다. 끝없이 이어지는 평행선 철길처럼 접점이 보이지 않자 불안하고 우울한 사람이 늘어나면서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초기에는 집안에 갇힌 상황을 긍정하며 전화나 문자로 마음을 나누고 SNS로 세상을 읽고 영화도 보고 강의도 들으며, 담담해 보려고 애썼다. 불편한 정도를 넘어 생계 문제가 달린 자영업자와 실직한 사람들을 걱정하며 그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로 서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2차 팬데믹 사태에서는, 영영 벗어날 수 없는 가상 공간이라는 심연에 세상이 갇히는 건 아닐까, 인간다움은 사라지고 감성 없는 기계처럼 변해버리는 건 아닌가 싶어 흔들리는 것이다.

시청률을 유지하려고 TV 각 프로그램마다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대면하여 진행할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들이 도태된 자리에 객석 효과를 잃지 않으려는 자구책으로 랜선을 활용하여 시청자의 참여를 호소한다. 몇몇 분야에서 이미 사용하던 랜선이라는 낯선 용어가 유행을 탄다.

LAN(Local Area Network)선, 근거리 통신망을 의미하는 이 생소한 단어를 조합하여 만든 랜선 여행, 랜선 친구, 랜선 집사 같은 신조어가 젊은 층에서 인기라고 한다.

‘랜선’이 대면 모임을 할 수 없어 선택한 대안이라고는 하지만, 손발을 직접 움직이지 않고 영상을 통해 눈과 입으로만 하는 생활이 노멀이 되는 건 아닐는지. 남이 하는 여행을 누워서 구경만 하고, 남이 키우는 반려동물을 보며 만족감을 느끼고, 남이 만드는 것을 눈으로만 즐기는 수동적인 생활 태도에 길드는 건 아닌지 염려된다. 이 사태의 끝이 어떨지를 우리는 애써 긍정적으로 예측한다. 그러나 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아무도 내일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테스 형’한테 물어볼까? ‘테스 형’은 최근에 가수 나훈아가 불러서 인기몰이하는 가요다. 테스 형은 소크라테스를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으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세상살이가 왜 이리도 힘든지 묻는 노래다.

‘...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먼저 건너간 세상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을 테스 형을 깨우는 노래가 진지하다. 팬데믹 상황이지만 ‘죽어도 오고 마는’ 내일이 암울하고 두려운 것만은 아니라고,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다고 위로하는 테스 형의 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들린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라고 하던 소크라테스 형은 알까, 세상이 왜 이런지를? 왜 이렇게 힘든지를?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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