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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

2020-11-27 (금)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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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백악관 로즈가든 기자회견에서 대선 불복의사를 밝힌 트럼프 대통령의 헤어스타일이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오렌지 빛 금발머리가 은빛 백발로 변한 모습을 보고 다들 의견이 분분했다. 대선 패배 스트레스와 마음고생으로 머리가 하얘졌다, 염색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동정심을 얻고자 한 것이다 등등.

20대부터 유지해온 금발 헤어스타일은 트럼프의 트레이드마크이다. 이렇게 단시간에 머리카락이 갑자기 하얗게 세는 증상을 ‘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Marie Antoinette Syndrome)이라고 한다.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앙투아네트 왕비가 처형당하기 며칠 전에 머리가 백발로 변한데서 명칭이 유래됐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당시 나이 37세. 그녀는 수천 명의 사형수가 수감되었다가 죽어간 콩시에르 주리에 수감되었다. 10년 전 쯤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 육중한 대리석 기둥이 줄지어 선 분위기가 으스스하던 그곳 기프트 샵에 걸린 커다란 앙투아네트 초상화의 긴 머리가 회색이라 의아했던 적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예는 많다.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먹고 사형을 당할 때 제자 플라톤은 순식간에 늙어버려 머리가 희게 세고 주름이 짙어졌다고 한다. 중국 양 무제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주흥사를 불러 하룻밤 사이에 천자(千字) 시를 짓도록 명령했다. 만일 완성 못하면 죽음이 따를 것이라고 했다. 같은 글자가 겹치지 않게 4자씩 짝을 지은 250구(句), 즉 천자문을 완성한 새벽, 먼동이 터오는데 주흥사의 머리카락이 하룻밤 새 하얗게 세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자문은 백발문이라고도 한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의 애리조나주 패배 요인 중 하나인 2008년 대통령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 그는 베트남 전쟁 때 포로로 잡혀서 5년간 하노이 감옥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하자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나이는 38세.

소설, 드라마, 게임 등에도 갑자기 흑발이 백발로 변하는 예는 수없이 나온다. ‘삼국유사’의 조신은 인생사를 한바탕 꿈꾼 후 일어나니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얗게 세어버렸고, ‘삼국지’의 조조, 관우도 힘든 일을 겪자 하룻밤 새 흑발이 백발로 변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의 공포로부터 생존한 사람들에게도 이 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앨라배마 주립대와 버밍엄대 공동연구진이 발표한 것이 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발동하는 면역 체계가 모발의 멜라닌 색소 생성을 방해한다는 것. 그러나 이에 대한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도 않았다. 신빙성은 없지만 극심한 스트레스와 강한 충격, 공포와 불안을 집중적으로 받으면 이럴 수 있으리라는 데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우리 주위를 한 번 살펴보자. 코로나19 확산세가 늘어가는 요즘, 새치가 갑자기 늘고 오랜만에 만난 친지나 친구의 머리 뿌리가 백발로 변해도 염색하기 귀찮다고 그대로 내버려둔 경우를 종종 볼 것이다. 이러한 백발 요인을 제거하려면 공포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한다. 제일 먼저 ‘내려놓는 것’이다. 더 이상 욕심, 기대, 부질없는 계획, 다 내려놓고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이다. 되는 일이 없다고 화만 내지 말고 먼저 수렁에 빠진 자신을 건져야 한다. 화를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대선 패배 16일 만인 23일, 트럼프 대통령은 조 바이든 당선인이 정권 인수에 필요한 절차에 협력할 것을 연방총무청에 지시했다. 여전히 대선 불복 시도를 하고 있지만 요즘 골프를 자주 치고 있는 것이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쓰는 것으로 보인다.

24일 추수감사절 칠면조 사면식에 참여한 트럼프의 머리는 여전히 금발이 아니다. 주위 시선이나 머리 염색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럴 기분이 아니더라도 풍성한 금발 헤어스타일에 일단 미소 짓는 여유를 보여주기 바란다. 그래야 미국 민주주의가 바로 선다.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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