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울림

2020-11-21 (토) 최효섭 / 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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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나는 한국적인 정서는 ‘울림’이라고 대답한다.

가야금 거문고 피리 퉁소 등은 모두 울림을 중심으로 한 악기들이다. 소학교 5학년 때 열개의 학교가 각각 5명씩의 대표를 뽑아 글짓기 대회를 개최한 일이 있었는데 나도 뽑혀 수양산 골짜기에서 글을 지었다.

나는 깨진 낡은 항아리에 물 떨어지는 울림과 절간에서 울려오는 풍경 소리와 바람에 울리는 나뭇잎 소리를 하나로 묶어 글을 짓고 우수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심사위원이 “산골짝의 여러 울림에 착안한 것이 기특하다”고 칭찬해주었다.


서양음악의 대가인 바흐도 “작곡에서 중요한 것은 음과 음 사이에 대한 처리다”고 함으로써 울림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하였다. 울림이 한국적인 것으로 연결된 것이 ‘정’이다. 한국인은 정으로 이어진다.

모녀의 정, 사제의 정, 친구의 정 등, 정으로 연결되는 것이 한국인의 특색이다. 정이 바로 울림이다. “정일랑 주지말자”라고 노래는 하지만 역시 한국인의 사랑은 정으로 대표된다. 모든 것을 내주는 것을 “마음 주고 정도 주고”라는 표현을 쓴다. 정을 영어로 표현할 수가 없어 그저 jung으로 표기한다.

한국인만이 그 뜻을 알 수 있는 매우 어려운 한국어이다. 외국인이 한국말을 배웠다는 것은 그 뜻을 안다는 것이지 말이 풍기는 울림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물질문명과 개인주의의 창궐로 정이 식어가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한국인의 정을 나타내는 식사문화로서 냄비문화가 있다. 여러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할 때 냄비를 가운데 놓고 각자가 그 냄비에서 국을 떠먹었다. 여러 숟가락이 한 냄비 속에 드나들지만 개의치 않았다. 정이 오가는 한국적인 식사 장면이다. 지금도 ‘한솥밥’을 먹지 않는가! 정이 한국인의 유대이며 한국인의 인간관계이다. “정 떨어진다”고 말하면 관계를 끊겠다는 최후통첩과 같은 말이다.

“울림”과 “울다”는 같은 어간으로 구성되었다. 초상집에서 상제가 소리를 내어 곡을 하였는데 이것은 슬픔의 울림을 모든 조문객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초상집이 맹숭맹숭 조용한 것보다 상제의 울음소리가 형식적으로라도 들리는 분위기가 초상집의 바람직한 분위기로 본 것이다. 인간의 감정인 희로애락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한국문화이다.

옛시조 한 수 ”잘 새는 날아들고 새달이 돋아온다/ 외나무다리를 홀로 가는 저 선사야/ 네 절이 얼마나 하관대 원종성이 들리나니” 그림과 소리가 잘 어우러진 명작이다. 저녁이 되어 새들이 재잘거리며 둥지로 돌아가고 있는데 하루 종일 양식이나 돈을 얻어 돌아오는 중이 산골짝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 그때 이 스님이 속한 절간에서 은은하게 종소리가 울려오고 있다. 자연과 인간, 소리와 공간이 잘 어우러진 명작이다. 이런 것이 한국인의 정서인 울림인 것이다.

대만이 낳은 신학자 송천성(C.S. Song)박사는 한국 일본 중국의 고전문학을 두루 연구하고 이 세 나라 사람들의 공통적인 감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울림’이라고 하였다. 세 나라의 고전문학이 모두 인간관계의 울림(Echo)을 문학 속에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한국의 고전 ‘아리랑’에서 마지막 고개인 열두 고개를 넘는 나그네의 발걸음 속에 동양인이 모두 가지는 한(恰)이 서려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의 모든 고전에 한이 서려있다. “한 많은 한국인”이다.

<최효섭 / 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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