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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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전투에서 뜻밖 패배…도망자 왕건이 몰랐던 그곳

2020-11-06 (금) 대구=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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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박자박 소웁탐방 - 대구 동구 팔공산 ‘왕건의 길’

노인 없는 불로동, 대패했다 파군재, 지혜로운 지묘동, 몰라 봤다 실왕리, 한숨 돌린 안심동, 반달 떴네 반야월, 홀로 앉아 독좌암, 얼굴 펴진 해안동. 대구 동구 팔공산 자락에는 왕건과 관련한 지명이 유난히 많다. 고려 태조 10년(927), 왕건은 후백제의 침공을 받은 신라를 구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내려오다가, 경주를 약탈하고 되돌아가던 견훤의 군사와 팔공산 일대에서 격전을 벌인다. 그때까지 승승장구하던 왕건의 군대는 공산전투에서 의외의 일격을 당한다. 김낙과 신숭겸 등 휘하 장수 8명을 잃은 왕건은 병사로 위장하고 간신히 몸을 피한다. 열거한 지명은 모두 전투에서 패한 왕건이 도망가는 길에 생긴 에피소드와 함께 전해지는 이름이다.

위인과 관련한 이야기는 세월이 흐르면서 살이 덧붙여지고 미화되기 마련이다. 왕건과 관련한 지명도 조그만 단서 하나로 창작되고 윤색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왕건이 와신상담, 절치부심하며 처연하게 걸었을 팔공산 자락은 이제 외지인까지 즐겨 찾는 여행지로 변신하고 있다.

■왕건이 보지 못한 ‘노을 맛집’ 불로동고분군


불로장생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다. 늙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고을이라는 뜻이라면 더없이 좋겠지만, 대구 불로동(不老洞)은 의미가 조금 다르다. 팔공산에서 금호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곳은 왕건이 지나던 길에 ‘노인이 보이지 않는다’고 언급한 마을이다. ‘전쟁에 동원된 탓에 장정은 보이지 않고 여자와 아이들만 있다’고 해석된다. 내력을 몰랐으면 더 좋았을, 조금은 서글픈 사연이다. 불로동을 벗어나면 안심동이다.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한숨 돌린 곳이라는 뜻이다. 긴장했던 얼굴이 펴지고, 처량하게 길을 비추던 반달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안심 인근은 해안과 반야월이다.


불로동 동쪽 얕은 언덕에 삼국시대 고분 200여기가 일정한 간격으로 밀집해 있다. 대구 일대에서 외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고분군이다. 1938년 일제강점기에 2기를 발굴한 데 이어 1963년 경북대박물관이 조사했는데 이미 상당 부분 도굴된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도 표주박 형태의 돌무지덧널무덤(구덩이를 파고 목곽을 놓은 다음 자갈을 덮고 흙으로 다진 무덤)에서 신라 토기 조각과 금동제 장신구, 철제 농기구 등이 발견돼 4~5세기경 삼국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직경 15~20m, 높이 4m 내외의 봉분은 토착 지배 세력의 묘지로 추정된다.

고분군은 사적 제262호로 지정돼 현재 주변 일대가 깔끔하게 정비된 상태다. 주차장에서 억새와 관목이 어우러진 입구를 지나 언덕으로 오르면 크고 작은 봉분 사이로 산책로가 연결돼 있다. 도심 평지에 웅장한 형태로 조성된 경주 대릉원에 비하면 위엄이 떨어지지만, 전망은 월등하다. 금호강과 신천 주변 도심 풍경이 눈높이보다 조금 낮게 내려다보이고, 날이 좋으면 멀리 두류공원의 83타워까지 분지 지형의 대구 시내가 평온하게 조망된다.

어느 때 가도 좋지만 되도록이면 해질 무렵 방문해 보길 권한다. 깔끔하게 이발한 둥그런 봉분이 붉은 기운을 한껏 머금어 천년의 신비감에 휩싸인다. 부드러운 곡선 위로 해가 떨어지면 하늘과 땅의 경계가 빚는 단순미가 일품이다. 해가 지고 어둑해지면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불 밝힌 도심의 야경이 이국적인 풍광을 선사한다. 고대와 현대의 초현실적 결합이다. 도망가던 왕건이 이곳에서 쉬어갔다 하더라도 결코 보지 못했을 풍광이다.

■신숭겸만 돋보인다… 일곱 장수와 5000 병사는 어디에

불로동고분군에서 팔공산 방향으로 약 3km 올라가면 파군재 삼거리다. 공산전투에서 패한 왕건의 군사가 뿔뿔이 흩어진 고갯마루라는 뜻이다. 삼거리 가운데에 신숭겸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고, 동상 기단에 공산전투를 형상화한 부조 작품이 새겨져 있다.

파군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지묘동이다. 왕을 피신시키기 위해 지혜롭게 꾀를 낸 곳이라는 의미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왕을 지키기 위해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 장군은 이곳에서 왕건의 갑옷으로 갈아 입고 군사를 지휘하다 끝내 최후를 맞는다. 김낙 장군 역시 왕건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달리다 화살에 맞아 죽는다. 왕의 옷을 버린 왕건은 겨우 도망쳐 목숨을 건졌지만, 이 전투에서 8명의 아끼는 장수를 잃는다. ‘공산’이 ‘팔공산’으로 불리게 된 연유다.


지묘동 왕산 자락에는 현재 ‘신숭겸 장군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후일 왕건이 되돌아와 공산전투에서 숨진 이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사찰인 지묘사가 있었던 곳이다. 현재는 신숭겸의 위패를 봉안한 표충사(表忠祠)가 맨 위에 자리 잡았고, 최후를 맞은 자리에 조선시대에 세운 순절단이 꾸며져 있다. 피 묻은 흙과 의복을 수습해 쌓은 단이다. 옆에 ‘고려장절 신공순 절지지(高麗壯節 申公殉 節之地)’라 새긴 비석도 있는데, 역시 조선 후기에 후손들이 세웠다. 이곳에서 수습한 그의 시신은 고향인 춘천에 묻혔다. 공산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5,000병사는 말할 것도 없고, 함께 숨진 장수가 여덟인데 별다른 언급이 없는 점은 의아하다.

불로동에서 동쪽으로 더 깊숙한 골짜기에도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모영재라는 사당이 있다. 사당이 위치한 곳은 행정구역상 평광동이지만, ‘시량리’ 또는 ‘실왕리(失王里)’로도 불렸다. 왕건이 피신하다 문득 사라진 마을이라는 의미다. 어느 백성이 왕건에게 식사를 한끼 대접했는데 초라한 행색에 신분을 알아보지 못했다가 떠난 후에야 왕인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도 그럴듯하다. 평광동 모영재로 가는 산자락은 온통 사과밭이다. 기후온난화로 지금은 강원도 산골에서도 사과 재배가 가능하지만, 한때는 사과 하면 대구였다. 말하자면 평광동은 ‘대구 능금’의 맥을 잇는 최후의 보루다.

■왕건이 길을 얻은 작은 암자에 윤곽만 남은 불상

왕건이 견훤과 격전을 벌인 곳은 공산동수(公山桐數), 지금의 동화사다. 신라시대인 493년(소지왕 15) 유가사라는 명칭으로 창건해 832년 중창하고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 중창한 시기가 겨울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했다는 설화를 간직한 이름이다.

동화사는 지금도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로 대구에서 가장 큰 사찰이다. 입구에서부터 대웅전, 극락전, 통일대전 등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오면 족히 두어 시간은 걸린다. 부속 암자까지 치면 팔공산 남측 골짜기 일대를 경내로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염불암은 가장 높은 곳에 있다. 팔공산 정상 바로 아래 해발 800m 지점으로 본당에서 약 2km, 걸어서 1시간가량 걸린다. 경사를 감안하면 등산이지만 차량 한 대 지날 정도의 도로가 나 있어 걷기는 순탄한 편이다.

염불암은 왕건이 도주로를 안내받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신 없이 쫓기다 암자 부근 널찍한 바위에 앉아 쉬고 있는데, 염불암의 선사가 도망갈 길과 마을의 지형을 일러주고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뜻밖의 패배를 당한 왕건으로서는 삶의 방향을 제시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재 그가 앉았다는 바위는 찾을 수 없고, 조그만 법당 뒤의 커다란 바위가 유난히 눈에 띈다. 서쪽과 남쪽 경사면에 선으로만 간결하게 표현한 2개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윤곽만 남아 조각하다 만 것 같은데, 자그마한 암자의 불상으로는 오히려 적절해 보인다. 극락전 마당에는 탑신은 없고 옥개석만 포개 놓은 키 작은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대구=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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