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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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의 시간여행 14. 시계 이야기 #9: 모래시계(하편)

2020-11-02 (월)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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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절대 꼰대들처럼 안 살 거야.”

제프의 시간여행 14. 시계 이야기 #9: 모래시계(하편)
제프의 시간여행 14. 시계 이야기 #9: 모래시계(하편)

지금은 사라진 진풍경. 미국 간다고 김포공항에서 헹가래 세리머니를 받았다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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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는 브레이크 장치가 없다. 한번 시작한 동작은 끝이 날 때까지 계속된다. 모래시계의 원동력은 중력이다. 시간과 중력은 영원한 가치다. 나약한 인간은 주어진 시간 안에 살아가며, 그리고 중력의 힘 덕분에 두발이 땅에 지탱 가능하다. 지구의 궤도 속도는 초속 30KM 정도인데 중력이 없다면 우리는 지구 밖으로 날아갈 것이다. 그리고 유리관 안의 모래알도 떨어지지 못한 채 시간도 멈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중력인 우리를 끌어주는 힘과 삶을 지탱시키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존재치 않았던 시간, 버려진 시간과도 같다. 삶의 의미는 나를 그리고 누구인가를 사랑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사랑이 바로 힘이다.


#남녀 공학
중학교에서 공업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느낀 것은 학생들의 눈초리에서 ‘꼭’ 짚어 표현할 수 없는 다른 것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 다른 모습을 이해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용산에서 태어나 줄곧 용산에서 학교를 다녔기에 당연히 용산 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했다. 그러나 타의에 의해 용산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궁핍하다고 느낀 우리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반장이 되었다.
그리고 키 순서로 앉혔던 우리 반에서 나는 72명중 71번이었다. 그래서 맨 뒤에서 바라보면 어느 누가 장난을 많이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키가 컸던 덕분에 ‘학도 호국단’ 중대장도 맡았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당시에 드문 남녀 공학이었다. 기계과였던 우리 반에는 여학생들이 없었으나 다른 과에는 남녀 학생들이 수업을 같이 들었다. 절대적으로 남학생 수가 많았던 학교에서 여학생들은 인기도 좋았지만 차별 또한 심했다.

한번은 교무 선생님이 각과 반장(모두 남학생)들과 같이 각 교실을 점검하던 중 남녀 공용 교실에 들어서서 갑자기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역시 여자 냄새가 나는군!” 하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뒤에 서 있던 남학생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며 덩달아 웃어 댔는데… 나는 직감적으로 여학생들을 비하하는 듯한 그 교무 선생이 엄청 싫었다. 어린 나이에 부적절한 선생님들의 언행으로 얼마나 많은 여학생들이 마음을 다쳤을까? 그 여학생들을 사랑으로 감싸줄 수 있는 여교사들이 공업학교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신문배달 하던 친구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고 1 때 체험했다. 우리 기계과 학생들은 똑똑한 학생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그 번득이는 총명함과 반비례 하는 가정환경 탓에 반항아로 돌변한 친구도 있었고 주어진 삶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중 한 친구는 서부 이촌동 기찻길 옆 판잣집에 살았다. 그는 하교 후 신문 배달을 하며 용돈을 벌었다. 어느 한날 그를 따라 신문 배달을 갔다. 엄청 많은 분량에 놀랐고 그 비좁은 골목들을 후벼 돌며 수많은 주소들을 정확히 찾아내서 배달하는 그 친구의 뒷모습이 한편 안쓰럽고 한편 자랑스러웠다. 그날 그 친구에게 배당된 신문더미들을 보았을 때의 무게감은 각 가구를 돌 때마다 줄어들고 손에서 모두 사라질 때의 그 홀가분한 마음과 성취감이 참으로 좋았다. 배달을 마친 후의 해방감이란 나중에 사업 성공에서 느꼈던 그런 기분이었다.

일이 끝나자 우리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반쯤 연 여닫이 문 사이로 녹슬어 구멍 난 양철 지붕 모퉁이가 보이고 그 사이로 빠끔히 들어오는 햇살 아래 그의 어린 여동생이 반찬도 없이 밥에 간장을 비벼 먹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무엇인가 황급히 챙기고 나왔다. 당시 가까이 갈 곳이라고는 한강변. 우리는 그 강변을 말없이 걸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는 자기 어머니 자랑을 늘어놓았다. 얼마나 활동적이고 훌륭한 어머니인가를… 말은 안했지만 나 역시 아버지가 미국으로 떠난 후 어머니가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었기에 그의 말에 공감했다. 그러나 그때 그 녀석의 어머니 자랑이 왜 가슴 아프게 느껴졌을까? 나야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지푸라기 잡을 희망도 없는 친구는 어떻게 살아갔을까?

#꼰대처럼 살지 말자
그렇게 걷고 있다 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지? 아니 반드시 올 거야!”
그는 노을이 비치는 한강대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야, 당연하지. 우리는 꼰대들과 달라. 절대 꼰대들처럼 안 살 거야.” “언제쯤, 우리들의 날이 올까….”
반 희망 그리고 반은 자조 섞인 내 말이 한강 바람에 날렸다.
공고나 상고 학생들의 공통점은 집안 경제가 어렵다는 것 외에도 대학진학을 포기했다는 그 좌절감이 항상 가슴을 짓눌렀다. 학교 교정에는 어느 학생이 무슨 경연 대회에서 우승했는지 또는 졸업생 중 어느 누가 유수 기업에 입사했는지가 붙어있었지만 무엇인가를 타의에 의해 박탈당한 피해의식이 분명 존재했다. 일반 고교 학생들에게 대입 기간이 오면 공고 학생들은 치열한 입사 준비를 해야 했다. 입사를 하고 못하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집안 살림과 직결돼 있는 문제였다.

#문법 때려 치고 회화만 배워
고등학교 1학년 일 학기 여름방학이 오기 전 어느 봄날, 담임의 호출에 교무실을 찾았다. 두꺼운 안경을 착용한 수학 선생 담임은 안경 너머로 날 보더니, “그동안 수고했다. 다음 주 부로 반장이 *** 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하셨다.
중학교 때 한번 반장에서 퇴출 되었던 경험이 있던 나는 별반 놀라지도 않았지만 서운함은 같았다. 나가려는 나에게 담임이 말했다. “미국 가면 영어만 해야 되니까, 문법 같은 거 다 때려치고, 회화만 배워.” 미국 이민 간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에게 미국 간다는 통보를 담임에게서 들었다.

#공항에서의 이별
그리고 떠나는 날이 한순간 다가왔다. 김포공항에는 집안 식구들과 친구들이 마중 나와 여동생은 꽃다발을 받고 형은 동창들에게 헹가래를 받으며 하늘 높이 솟구쳤다. 당시 공황에서의 작별은 이별이며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길이었다.
홀로 한국에 남게 된 어머니는 세 자녀를 떠나보내면서 얼마나 심경이 착잡했을까. 곱게 차려 입고 나오신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작별 인사는 곧 눈물바다로 변했건만 강인한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난 그 자리에서 어머니와의 상봉을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세상 삶이란 모두 자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고 입학 그리고 미국으로의 이민, 모두 내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시작된 미국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 내 짧은 인생에서 배운 것은 가족 간의 사랑, 교육에 대한 집념, 그리고 인간은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부모님 공장에서 보았던 시골에서 올라와 미싱을 밟던 여종업원들, 공업 또는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이나 은행 등 산업 전선에 바로 뛰어 들었던 젊은이들, 그들의 피와 땀이 한국 발전의 밑거름 아니었을까? 미지의 세계였던 미국에서 비로소 나에게 자력으로 인생을 바꾼 순간이 찾아온다. 미군에 자원입대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겠다.
<다음에 계속>

(jahn8118@gmail.com)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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