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앵콜클래식] 미완성

2020-10-30 (금) 이정훈 기자
크게 작게
인류의 기대수명이 높아졌다고 한다. ‘백세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류는 이제 은퇴 이후의 삶을 더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은 어느 정도 살아야 가장 적당할까? 구약 성서에 보면 인간이 한때 9백 세를 넘겨 살았고 아브라함 때만 하더라도 1백75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오래 산다고 행복을 더 보장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수명이 길어졌다는 것은 해 보고 싶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인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삶을 살다 보면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도중에 멈출 수밖에 없는 허다한 일을 겪곤 한다. 하나의 가치가 다른 하나의 가치를 넘어서는 그런 객관적인 기준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우리는 늘 임의적인 가치로 하나를 포기하고 다른 하나를 선택하는 그런 미완성의 삶을 살아간다. 지나고 보면 후회가 되고 또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끼곤 하지만 늘 모자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요 또 그 모자람 때문에 가 보지 못한 길, 미완성의 삶이 더 안타까운 그리움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꾸준히 한 길을 걸어오지 못했을까? 왜 누군가의 재능은 부러워하면서 묵묵히 자기 길은 걸어오지 못했을까? 늘 물질적인 여유는 추구하면서 삶을 만행하듯, 그렇게 조용히 자기 영혼을 돌아보는 삶을 살아오지 못했을까? 오직 동경으로 그치고 만 우리들의 삶이 후회로만 다가온다.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여유로운 삶의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나도 그러한 단순한 목표가 있었다. 그러니까 큰 부자는 아니래도 자유롭게 자기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그러한 삶의 목표가 있었다. 물론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물질적인 문제와 여러 가지 삶의 의무에 대해서의 해방도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나의 경우 산속에서 도나 닦으며 혼자 사는 삶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 역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삶은 아니었으므로 나의 삶은 아직도 번뇌 속에 얽히고설킨, 자신과 남을 괴롭히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속세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젊은 시절 음악으로 도피해 갔던 것도 어쩌면 음악이 주는 그런 자유에 대한 갈망이라고나 할까, 잡힐 듯 말듯 초월의 경계… 피안의 언덕을 넘어가는 그런 아스라한 도취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삶이란 어쩌면 가장 확실한 것보다는 음악처럼 잡을 수 없는, 그런 아스라한 미완성적인 것에 대하여 더 풍요로운 목마름이, 꿈을 연장하며 희망을 더 벅차게 부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 8번)’이 명성만큼 그렇게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E b)라든지 가곡이라든지 슈베르트의 아름다움을 느껴 볼 수 있는 작품은 얼마든지 많다. 다만 이 작품이 슈베르트가 사망한 뒤에 발견된 작품이어서 다소 당시 사람들의 호들갑이 작용했겠지만, 슈베르트 자신도 이 작품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듯싶다. 작곡하다 말고 갑자기 교향곡 9번으로 방향을 틀었다. 물론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고독이 느껴지기도 하고 낭만이 몰려오기도 하지만 이 작품이 안기는 진수는 뭐니 뭐니 해도 수수께끼 같은 진한 외로움일지도 모르겠다. 먼 길가는 나그네의 감정이라고나 할까, 갑자기 멈춰버린 삶의 여행, 멀리서 바라보는 외딴 산속의 정경… 진한 고독, 방랑자의 외로움… 이러한 것들은 슈베르트의 모든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쓸쓸한 감성의 특징이지만 특별히 교향곡 8번의 2악장 같은 경우는 슈베르트가 남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고 할 만큼 진한 쓸쓸함이 묻어난다.


미완성은 1822년 작곡에 손을 댔지만, 슈베르트의 생전에 발표되지 못한 채 묻혀있다가 1865년 슈베르트가 사망한 지 37년이 지난 뒤 빛을 보게 되었다. 슈베르트의 작품 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감성적 아름다운 때문에 당시 선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이기도 하다. 발표 후 미완성이라는 이름 때문에 더욱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지만, 요절한 천재 슈베르트가 생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그러나 제목이 미완성이기때문에 이 작품이 상대적으로 더욱 특별한 가치가 인정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미완성이기 때문에 작품의 진중한 맛, 완성도를 훼손시키고 있는데 만약 완성됐다면 슈베르트의 최고의 작품으로 남을 만한 작품이기도 했다. FM 라디오의 인기곡 100순위 리스트에 보더라도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일명 Great)이 순위 19위에 올라 있고 이 곡은 100위 안에는 빠져 있는데 미국인들에게 보다는 오히려 한국인의 감성에 더 어필하는 인기곡이기도 하다. 예전에도 ‘미완성’은 늘 연말 인기곡 순위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중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작고 소식이 전해져 왔다. 재능이 있거나 없거나 혹은 성공했거나 행복은 누구에게나 미완성인 것 같다. 이건희 회장처럼 지나친 재산 때문에 (그 압박감으로?) 건강을 해친 사람도 많다. 재능 때문에 오히려 불행해진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다. 행복이란 어쩌면 자기가 행복한지도 불행한지도 모르는 그런 무아의 사람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늘 자기 세계를 묵묵히 추구해 나가는 사람. 주위의 시선이나 경쟁의식에 희생되지 않는 사람. 누구나 다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삶이 동경이 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건희 회장의 마지막 어록에는 무엇이 남겨져 있을까? ‘고단한 인생길, 잠시 쉬어감도 나쁘지 않으리라…’ 인생은 이룰 수 없는 사랑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 동반 없는 사랑, 사랑 없는 동반… 한 부자의 마지막 길 그리고 살아생전 가난하고 비참한 삶으로 끝맺었던 한 예술가의, 차마 끝내지 못한 교향곡의 여운이 우리 인생의 모습, 미완성의 안타까운 유전자(DNA)를 전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이정훈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