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매일 흙 밟는 삶 행복, 사는 것 별 것 없어요”

2020-10-22 (목) 유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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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A 컬페퍼 카운티 야산을 농장으로 가꿔

▶ 혈당수치 450 심각한 당뇨서 100으로 떨어져

“매일 흙 밟는 삶 행복, 사는 것 별 것 없어요”

30여년의 미국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지난 2013년 버지니아 컬페퍼 카운티의 한 야산을 매입해 농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박해주 씨.

◆기획특집: 인생 2막을 여는 한인들
30년 공직생활 청산하고 농부가 된 박해주씨

진짜 인생은 은퇴 후부터. 평생의 생업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가족과 먹고 사는 데 급급했다면 이제부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즐긴다. 또 어떤 이는 남을 위한 봉사의 시간 속에서 보람을 찾는다. 은퇴 후 ‘뒷방 늙은이’로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새로운 인생 2막을 열어젖힌 한인들을 찾아 그들의 꿈과 행복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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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어린 시절 논밭에서 뛰어 놀던 추억이 있다면 나이가 들수록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한인들이 은퇴 후 전원생활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저 말일뿐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이처럼 바라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결심하기는 쉽지 않은 전원생활. 30여년의 미국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지난 2013년 버지니아 컬페퍼 카운티의 한 야산을 매입해 농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한인이 있다.

박해주 씨(64)는 농사를 지어본 경험은 없지만 어느덧 8년 넘게 농부로 살다보니 “이제 자연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연인이 됐다”고 한다. 산나물, 약초, 각종 채소를 키우며 말똥 퇴비로 거름을 주고 농약 대신 일일이 잡초를 뽑고 벌레도 손으로 잡는 등 농사일이 만만치 않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하루 종일 밭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는 “높은 연봉에, 넓은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봤지만 사는 게 별거 없다”며 “오히려 소박한 지금의 생활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은퇴하기 전에는 혈당수치가 450이 넘을 만큼 심각한 당뇨였다는 그는 “약물치료는 물론 식이요법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했지만 직접 재배해서 먹는 야채만큼 좋은 것은 없다”며 “현재는 100정도로 떨어져 유기농 농산물의 효능을 직접 체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소문을 듣고 유기농 농산물을 구입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흔히 볼 수 없는 자색 고구마, 수박 무, 도라지, 더덕, 항암 배추 등이 주요작물이다.
그러나 수익을 올리기 위해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닌 만큼 팔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그저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눠줄 뿐이다. 반면 “아직까지도 농부로 사는 게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는 그의 부인은 “처음에는 유유자적, 낭만적인 전원생활을 기대했으나 농사일도 쉽지 않고 돈도 많이 들어간다”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라고 조언한다.

전원생활의 꿈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땅을 매입하고 관련 허가를 받는 일도 쉽지 않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일궈 작물 재배에 성공하기까지는 끈기와 노력, 수많은 시행착오에 따른 비용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흙을 밟고 살아가는 매일의 일상이 행복하다는 그는 “성과를 기대하며 경쟁에 조바심치며 살았던 과거와 달리 흘린 땀만큼 무럭무럭 자라나는 자연을 보면 그저 사랑스러울 뿐”이라며 “더 일찍 은퇴를 결심하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말한다.

100세 시대를 맞아 이제 은퇴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과감하게 농부로서 인생 2막을 시작한 박해주 씨는 “당장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야산에 뿌려둔 한국산 산삼이 커나가듯 다시 한번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다음 세대를 위한 터전을 만드는 계획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유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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