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분노의 벌

2020-10-07 (수)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크게 작게
벌도 화를 낼까? 지적인 사고기능이 있어야 감정이 나타난다. 그런 이유로 옛적엔 인간만이 감정이 있다고 믿었고 그 후 영장류와 척추동물도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최근에는 전체 지구 동물의 거의 9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곤충을 포함한 무척추동물까지도 원초적 감정이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반 년 전 이사 온 집 뒤편에 손바닥만 터가 있다. 코비드-19이 안겨준 지루한 시간을 견디려고 뒷마당에 조그만 채소밭을 만들어 오이, 호박, 상추 그리고 몇 가지 꽃나무들과 탠저린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하자 노랑 바탕에 검은 줄이 처진 꿀벌들이 찾아 들었다. 대기오염이 심한 어느 지구촌에는 벌과 나비가 사라졌다는데 이곳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달 전 뒤뜰 처마 바로 밑에서 주먹크기의 벌집을 발견했다. 꽃가루를 날라다 열매를 맺게 해주는 고마운 벌들의 보금자리이지만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위험 때문에 없애기로 했다. 모자에 마스크, 안경, 모자달린 재킷, 팔 전체를 덮은 긴 장갑으로 무장하고 긴 막대기로 벌집을 끌어 내리는 순간 벌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많은 벌들이 그 조그만 벌집에 사는 줄은 미처 몰랐다. 벌들은 본능적으로 약탈자인 나에게 달려들어 그중 두어 마리가 내 왼쪽 눈썹 위를 쏘았다. 따끔하다는 느낌이 들며 골프장에서 벌에 쏘인 후 과민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응급실로 실려간 친구가 생각났다.

몇 시간이 지나자 달아난 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해 처마밑 벌 집터에 수십 마리가 서성거렸다. 벌들도 환각지 증세(Phantom Limb symptom)가 있는지 집이 사라졌는데도 집이 있다는 환상 때문에 돌아온 듯싶다. 환각지 증상은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후에도 절단된 부위에 계속 통증을 느끼는 현상이다. 절단된 부위의 말초신경은 없어졌지만 중추신경인 뇌가 주위 뇌세포를 자극하여 새로운 통증 뇌 회로를 만드는 뇌의 가소성 그리고 사지가 절단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심리적 방어기전이 합쳐져 일어나는 반응이다. 환각지 증상은 임시 현상으로 시간이 가면 대부분 사라지는데 벌들은 그렇지 않았다.


일주일쯤 되었을까, 벌들은 없어진 집터에 다시 집을 짓기 시작했다. 호스 물로 쓸어버릴까 하다가 너무 잔인한 것 같아 그만 두었다. 혹시 벌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나 우울증을 앓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벌들은 자기 집이 갑자기 부서졌을 때 공포와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공포와 분노는 거의 모든 정신질환에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공황장애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공포가 주요 감정이고 분노는 우울증을 초래한다.

벌들이 나 때문에 경험한 공포감, 분노를 생산적 방향으로 승화시켜 자신의 생존과 미래의 자손을 위해 묵묵히 집짓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생명의 위협이나 심한 신체적 위험상황을 체험한 뒤 나타나는 정신적, 신체적 고통 때문에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정신질환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다. 대부분은 서서히 회복하지만 그중 6-7% 정도가 지속적인 공포감과 분노로 고생을 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상당수가 우울증을 동반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 치료는 초기에 약물로 증세를 완화시킨 다음 인지행동 치료로 왜곡된 생각을 고쳐주고, 사회적 기술 훈련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정신심리치료가 효과적이다.

벌에 쏘인 후 부어오른 눈꺼풀이 왼쪽 눈을 반쯤 덮어 일주일 이상 불편을 겪었다. 앞이 잘 안보여 책도 TV도 볼 수 없었고 통증과 가려움으로 고생했지만 결코 쏜 벌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벌들 사정이야 어떻든 나만 편하겠다는 이기적 행동으로 그들에게 큰 상처를 준 죄값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인간은 동물의 본능을 막을 수 없다. 그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게 어길 수 없는 자연의 법칙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벌에 쏘인 고통이 삶을 보다 넓게 읽을 수 있는 계기를 주었던 것 아닐까?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