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젊은 시절 차시던 18K, Breguet.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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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백혈병
수십 년이 흐른 후, 나는 두 딸의 아버지가 되어 아버님을 모시고 사는 처지로 바뀌었다. 7-11, 그리고 High’s를 거쳐, DC 어느 정육점에서 일하시던 아버님이 피를 토하시며 갑자기 쓰러지셨다.
불치의 백혈병이었고, 병 치료는 고투의 3년이었다.
나이에도 건강하시던 체구는 병마에 점차 그 모습을 잃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티시던 나날들. 너무나 강해서 자식들에게 단 한번 사랑한다는 말씀을 못하셨던 분.
마지막 길을 가시던 그날 저녁, 야속히도 덜컹거리는 앰뷸런스에서 나는 앙상히 메마른 아버지의 몸을 품에 안고, 가는 실눈으로 나를 쳐다보시던 아버지에게 내 평생 처음이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 사…” 그러나 용기 내어 하려던 말문이 턱에서 막혔다.
그런데 아무 기력이 없으시던 그분의 입가에서 엷은 미소가 비쳤다. 그 모습에 ‘억’ 뜨거운 눈물이 목구멍 저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아버지,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고… 저 세상 가도 아버지, 우리 아버지 해….”
아버지의 대답대신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맴 맴” 했다. 그리고 나의 손에서 아버지의 팔이 ‘툭’ 하고 차디찬 쇠 의자 위로 떨어졌다. 아무리 그 팔을 다시 잡고, 힘을 줘보아도 이미 날아간 기운은 돌아오질 않았다. 아무리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 아버지의 유품
그분의 청렴함을 대변이라도 하듯 은행계좌에는 적은 액수만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남기신 유품을 정리하는 것은 단 몇 시간도 안 걸렸다. 그런데 아버님 방의 옷장 정리 도중, 양복 주머니 안에서 시계가 하나 나왔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시계. 미국생활에서 아버지는 몸에 귀중품을 안 하시고 사셨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적인 여유도 없으셨고, 하시던 일도 그러했고, 친구나 교회 활동도 없었다.
그런데 시계가 조금 범상치 않았다. 첫눈에도 무척 오래된 빈티지 사각형 가죽 시계는 ‘너, 나 아니?’ 하는 식으로 당당하면서도 세련된 룩이 압권이었다. 시계 앞판은 오랜 세월 탓에 영문체 글체들이 안보였다.
가죽은 구멍 주위가 헐고 낡았으나, 조용히 뒤집어본 시계 뒤판에는 뚜렷이 18K 하고 찍혀 있었다.
그런데 시계 유리가 헐렁해서 차고 다닐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수리하기 위해, 스프링필드 몰에 있던 시계점을 찾았다. 시계를 본 주인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Do you know, this is Breguet?” “No, What’s that.”
당시까지 로렉스만이 최고로만 알던 나에게 브레게(Breguet)는 생소한 시계 이름이었다. 그는 나에게 시계를 다시 건네며 브레게 전문 판매점을 찾아가서 수리할 것을 권했다.
구글 검색도 아직 존재하지 않던 세상이었다. 전문 판매점을 찾기도 귀찮고, 아버지가 나에게 남기신 오직 하나의 유품을 빨리 차보고 싶은 마음에 일단 크레이지 글루로 유리를 다시 시계에 붙여 며칠 착용해 보았다. 그저 아버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유리는 또 시계에서 떨어지고, 그 후 시계는 책상 속에 잠들게 되었는데….
# 내 책상 속의 브레게
또, 시간이 지난 후 그 브레게를 좀 더 알고 싶어졌다. 모든 예술품(명품 시계도 이에 속한다)의 생명은 Provenance(기원)다. 시계 영수증과 시계 박스는 매우 중요한데, 그런 것이 없는 이 시계.
그런데, 알링턴 집으로 이사 하면서 짐 정리 중에 아주 오래된 사진 한 점이 발견되는데….
어느 옛날, 고급 사진 점에서 찍은 듯한 단독 사진 속에는 포마드 바르고, 양복을 맛깔나게 차려 입고, 서있는 젊고 당당한 멋진 남자.
그 남자 소매 끝에 수줍은 듯, 살짝 내비치는 사각의 시계! 그 Breguet가 분명했다. 생전 아버지 원망만 하고 살았던 내가 너무나 불효했음을 또다시 깨우쳐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돌아보면, 내가 저질렀던 수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들…. 그때마다, 아버님의 회초리라도 있었더라면 하는 바람이다.
멍 같은 정맥 줄이 내 손등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저렇게 멋있던 한 남자는 미국에 와서 그로서리만 전전하는 점원으로, 그리고, 아끼던 고급 손목시계는 단 한번 차고 다닐 기회도 상실하고 양복 주머니 속에서 잠자야 했던 이민자의 사연.
불효했던 아들은 명품 시계의 진가만 못 알아본 것이 아니었다. 그 브레게는 아직도 수리를 못한 채 내 책상 속에 잠들어 있다.
<다음에 계속>
jahn81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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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