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헬로, 미스터 하아그로브!

2020-10-03 (토) 김덕환/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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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다닥~’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총알 같이 주방으로 달려간다. 치~익… 가스 렌지의 불을 끄고 벌겋게 달아 연기가 나는 냄비 바닥에 부랴부랴 찬물을 붓는다. 일요일 오후, 미캐닉에 차가 있는 관계로 내 일과 중 최우선 순위인 쇼얼라인 산책도 못 가고 침대에서 친구와 채팅 하면서 노닥거리고 있는데 삶고 있던 양배추가 눌어붙어 타는 냄새가 코끝에 전해 오는게 아닌가. 스모크 알람이라도 시끄럽게 울면 의자에 올라가 스위치를 리셋해야 돼 성가시게 된다.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걸 보니 아직 코로나바이러스를 염려할 상황은 아닌가 보다. 채팅 친구는 밴쿠버에 거주중인 미 해병 베테랑으로 월남전에도 참전했던 67세의 미스터 하아그로브인데 한국 문화와 한국사람을 그렇게 좋아한다며 첨성대 사진을 보내며 얼마전 친신을 해오더니 재미있는 포스팅을 발견하면 날 보라고 메신저로 링크를 자주 보내줘 요즘 내 스마트폰은 띵~ 띵 하는 알람 소리로 바쁘다. 같은 태평양 시간대에 사는 두 독신 남자들 끼리의 채팅의 화제는 여러 분야로 국경을 넘는다.

바른생활 과목에 특히 강세를 보이며 일생을 수더분 살아온 나는 데모나 반정부 활동을 한다든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라이프 스타일이었다. 한데 불쌍한 아이들이 많이 죽은 해난사고를 갖고 전직 대통령에 덤터기 누명을 씌워 탄핵질을 한 끝에 정권을 찬탈함으로써 국민을 양분시켜 극한 대결로 몰고 간 한국의 현 정권이 일삼는 이해 못할 행태를 보고 나는 사뭇 달라졌다. 이성을 잃은 정적에 대한 구금, 어이 없는 선동질로 인한 대일 외교관계의 파탄, 원전 산업의 자폭, 소주성으로 인한 고용 생태계의 파괴, 대미 동맹 훼손시도… 북한과 중국에 대한 어이없는 저자세 외교 행태, 그리고 정권 실세들의 위선적인 추악한 행태에 관한 보도 등을 보면서 크게 실망해 가출한 나의 어이는 요즘 돌아올 생각을 안한다.

하아그로브씨는 월남전에 미해병으로 참전했다 캐나다로 돌아간 후 캐나다 해병전력의 증강 프로젝트에도 지금껏 민간 전문가의 자격으로 관여하고 있다. 이중 국적인 그는 정치적으로는 미 공화당 성향인데 주말이면 식물원으로 발런티어를 나가 원예일로 재능 봉사도 하는 자연을 사랑하는 목가적인 사람이다. 4시간 정도의 빡센 노동의 봉사시간을 마칠 무렵이면 다른 자원봉사 여성들과 티타임을 가질 수 있는데 더러는 데이트로 이어질 때도 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의 혼란한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해 이미 소상히 알고 있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한다면서, 요즘 한국은 ‘없는 게 없는 세계가 알아주는 선진국’인데 근면한 한국인들이 지난 오십년간 한강의 기적으로 피땀흘려 이룩한 세계 6대 공업생산국(중·미·일·독·인도에 이은)이라는 빛나는 성취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일은 없어야할 것이라며 왜려 나를 위로해준다.

요즘 식사때 야채라고는 김치 몇 점 먹는 거 밖에 없다 보니…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애를 많이 먹는다. 최근 한 일주일간은 헤모로이드 때문인지, 철분 영양 보조제를 다른 브랜드로 바꾼 때문인지 변기가 온통 벌건 피로 물들어 나를 아연하게 만들었었다. 몇달 만에 가끔 오는 증상이기도 하지만 이번엔 좀 심해서 내 몸에서는 지금 부족한 피를 바삐 만들어 내느라 조혈 모세포가 과로를 하는 데서 오는 것이 분명한 아득한 피로감마저 느껴진다. 이러다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빈혈로 먼저 쓰러지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될 정도다.

금년 초에 받은 위장/대장 더블 내시경 검사에서 아무 문제가 없었으니 대장암 등 병변을 의심할 필요는 없겠고.. 그렇다면 귀차니즘으로 인한 섬유질 섭생의 부족과 새로 추가한 비즈니스로 한달 넘게 책상에 앉아 열공하며 머릴 싸매 생겼을 스트레스에 그 의심의 화살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마음 먹고는 잘 익으면 연해진 잎에서 단물도 맛있게 배어 나오는 양배추를 한통 사서 삶던 중에 남비를 태울 뻔한 것이다. 그 정도로 야채를 더 많이 섭취하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지 달리 천년 산삼을 달여 먹는다 한들 더 특별한 효능이 있을 거 같지는 않다.

코로나로 위축된 중에도 어김 없이 찾아온 한국 최대의 명절 추석을 맞아 가황 나훈아의 공연이 한국 방송 사상 최고의 순간 시청률이라는 엄청난 대박을 올리며 피로에 지친 귀성길 국민들을 많이 위로해주었다는 고국발 흐뭇한 소식이 방금 들려왔다. 이역만리 미국에 사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리운 고향의 추석이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바닷길을 걷는 문-라잇 하이킹을 위해 집을 나선다.

<김덕환/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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