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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클래식] 코스모스를 노래함

2020-10-02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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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침저녁으로 한국의 FM 방송을 듣고 있다. 팬데믹 이후 좀 더 자기 시간을 가져 보자는 취지로 여러 취미를 개발하고 있지만 정작 음악 듣는 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예전에는 FM 방송이나 클래식 코너 등을 통해 듣는 작품들도 많았는데 CD를 잔뜩 녹음해 담은 컴퓨터 음악을 듣기 시작한 이후로는 오히려 음악 감상 회수가 줄어들었다. 자기만의 좋아하는 음악을 듣자니 편식하듯 레퍼토리의 다양성이 줄어든 것 같다. 음질은 좋아졌지만, 트랜지스터로 음악을 들을 때보다 감동의 질이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시대가 시대인지라 한국의 라디오 방송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어 주파수를 KBS FM 클래식에 맞추어 놓으니 옛 추억이 새록새록 하다. 요새는 전화기에 (라디오) 앱 하나만 설치하면 전 세계 수천 개의 라디오 방송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다.

KBS FM 클래식을 찾아 지구 반대편에서 출력되는 FM 방송을 실시간으로 듣고 있자니 마치 한국에 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다만 예전에는 ‘코스모스를 노래함’ 같은 한국인의 정서를 잘 표현해 주는 가곡들을 많이 틀어주었는데 요즘은 그런 다양성은 조금 시들해진 것 같다. 가곡 프로그램이 따로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가을이 되면 가을 냄새 듬뿍 풍기는 가곡들이 음악 프로그램을 풍성히 장식하곤 했었다. 특히 본격적으로 선선한 날씨가 시작되는 10월이 찾아오면 ‘그리운 금강산’, ‘코스모스를 노래함’, ‘고향의 노래’ 등은 늘 들려오던 방송국의 단골 메뉴였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역시도 가을이 되면 코스모스를 떠올리곤 한다. 아마 이 꽃이 한국인에겐 가장 흔하고 평범한 꽃이면서도 가을이면 볼 수 있는 가을 정서에 알맞은 꽃이기 때문일 것이다. 코스모스가 없는 가을, 코스모스가 없는 추억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막상 가을을 주제로 음악 이야기를 쓰자니 코스모스의 추억 하나 없는 그런 메마른 삶을 살아온 것 같은 자책이 든다. 그저 떠오르는 것이라곤 가곡 ‘코스모스를 노래함’ 정도라고나 할까. 코스모스 오솔길을 함께 걷던 첫사랑 이야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낭만적인 추억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초등학교 시절, 가수 김상희가 부른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이라는 노래를 좋아했었던 기억이 난다. 노래가 좋았는지 가사가 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등교길에 전파상 같은 곳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올 때면 괜히 기분이 상쾌해져 무거운 발걸음조차 가벼워지곤 했었다. 특히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릴 때면 우산을 받쳐 들고 낭만적인 분위기에 빠져들기 좋은 곡이었다.


가을은 아마도 소년이 노인이 되고 노인이 소년이 되는, 그런 몽환의 계절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가을은 시인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시인 괴테도 아니면서, 가을은 왠지 늙은이를 젊게 하고 소년을 조숙하게 만드는 감상의 계절인 것 같다. 가을 추억하면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때 등교길을 함께 걷던 한 소녀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좋아했던 사이라기보다는 마당 너머 세 들어 함께 살던 집의 아이였는데 얼굴이 하얗고 예뻐서 속으로 좋아했던 것 같다. 그때의 감정은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런 애정의 문제보다는 이성(異性)의 경계가 없는, 그저 본능에 이끌리는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좋은지 싫은 지도 모른 채 좋기만 한 그런 감정. 그래서 어린 시절의 사랑이란 환상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대문 안에 살면서도 우리는 서로 모른척하며 지냈다. 학교 복도에서 만나면 서로 외면했고 등교길에서 그녀가 보이면 차마 앞서가지 못했다. 물론 서로 멀리서만 바라보던 그런 서로의 침묵은 어느 날 그녀에 의해 깨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좀 더 서먹해져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그녀의 집 앞마당에서 친구와 함께 구슬치기하다 그녀와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그녀가 의외로 도발적으로 다가왔다. 야, 너 4반 맞지!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까지는 그런대로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참을 수 있었는데 조목조목 여러 가지를 질문하면서 당황한 나를 마치 재미있다는 듯이 새침하게 바라보며 그것도 한참을 재재거린 것은 내가 알고 있던 그녀의 이미지와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금지된 장난’ 속에 십자가를 먼저 훔친 것은 그녀였고 나는 그날 이후 다시는 그녀를 마주 볼 수 없는 빙충이 소년이 되고 말았다.

코스모스에는 ‘소녀의 순결’(흰색), ‘소녀의 순정’(분홍색) 등의 꽃말이 있다고 한다. 그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꽃말이 좋았기 때문이었을까? 초등학교 5학년 2학기의 추억은 남다르다. 그녀와 같이 걷던 등교길, 그녀의 노란색 우산, 그리고 가을비… 괜히 연상만 해도 상쾌해지는 가을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코스모스는 원래 멕시코가 원산지로, 유럽을 거쳐 1890년쯤 일본에 들어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마도 일제 시대 이후에 퍼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코스모스’에는 그리스어로 ‘질서’ 또는 ‘우주’ 등의 뜻이 있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특별할 것이 전혀 없는 꽃 모양을 하고 있다. 향기가 있는 것도 아니며 색상이 화려한 것도 아니다. 다만 질서 있게 피어나 아름답게 무리를 이루고 사는 것은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과 닮았다고나 할까. 우리는 모두 각자 특별한 것 같지만 사실 대동소이한, 그저 너와 나의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 있을 뿐이다. 코스모스가 주는 이미지는 그런 가운데서도 무리 지어 살아가는, 삶의 공통분모인지도 모르겠다. 너와 나의 추억… 그리고 같은 가을 동화.

오랜만에 가곡 ‘코스모스를 노래함’을 들으며 코스모스의 정기를 흠뻑 들이켜본다. 이홍렬 작곡, 이기순 작사의 이 곡은 노래로서도 널리 사랑받는 곡이지만 가사를 통해 가을과 코스모스를 느낄 수 있는 맑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달 밝은 하늘 밑/ 어여쁜 내 얼굴/ 달나라 처녀가/ 너의 입 맞추고/ 이슬에 목욕해, 깨끗한 너의 몸/ 부드런 바람이 너를 껴안도다/ 코스모스, 너는 가을의 새아씨/ 외로운 이 밤에 나의 친구로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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