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정치판에서 합리적인 의제설정과 건강한 토론은 실종되고 오로지 상대의 약점을 잡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갓차(gotcha)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gotcha’는 ‘got you’의 줄임말이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너 딱 걸렸어‘ 정도의 뜻이다.
논란을 키우고 증폭시켜서 노리는 것은 물론 정치적인 이익이다. 잘해서 국민들의 점수와 지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실수나 도덕적 하자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궁지로 몰아넣음으로써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요즘 한국정치는 ‘갓차 정치’의 표본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너 딱 걸렸어’ 행태가 난무하고 있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의제와 방향성을 둘러싼 논의는 외면한 채 상대의 약점과 흠결을 잡아 이를 둘러싼 폭로와 공방으로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끊이지 않고 있다.
너무 많은 주장들과 폭로가 쏟아져 나오다 보니 국민들 입장에서는 진위를 분별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그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마음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진실과 사실은 실종되고 갈등과 대립은 커져만 간다.
미국정치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당 공화당 할 것 없이 상대 진영의 실수나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 포착됐다 싶으면 가차 없이 공격을 퍼붓는다. 그냥 발생한 일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덧을 놓아 걸려들게 만드는 수법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런 수법이 어김없이 동원되는 이벤트는 후보 토론회이다. 상대가 걸려들게 만든 다음 이것을 빌미로 정치적인 공격을 퍼붓는다.
토론회에서 A후보는 B후보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군을 사랑하는가?” 그러면 B후보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때 A 후보는 준비된 공격을 퍼붓는다. “그런데 당신은 퇴역군인들의 혜택을 늘려주는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러면서 어떻게 군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공박한다. 상대를 곤란한 처지로 몰아넣기 위해 교묘한 질문으로 유도한 것이다. 이 장면은 캡처가 돼 곧바로 A 후보의 캠페인 광고에 등장한다. 이런 방식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미국정치의 일상화된 풍경이다.
‘갓차 정치’의 확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미디어이다. ‘갓차’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1930년대부터이지만 이것이 저널리즘과 결합해 미국사회를 흔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였다. 언론인들은 정치인들과의 인터뷰에서 개인 신상에 관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이들이 곤란한 처지에 빠지도록 유도했다. 주로 외도와 마약에 관한 것들이었다.
저널리즘이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보도는 의제와 가치 이슈를 벗어나 점차 정치인들에 대한 협소한 인격검증과 결점 찾아내기로 변질돼 왔다. 저널리즘 변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정치의 변질이다. MSNBC 앵커였던 크리스 매튜스는 지난 2007년 “갓차 저널리즘에 이어 이제 갓차 정치가 시작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서로를 이용하면서 공생을 모색하는 저널리즘과 정치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이는 필연적인 수순이다.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모든 것이 ‘갓차 저널리즘’으로 시작해 ‘갓차 정치’로 끝나는 것 같다. 끌어내리고 싶은 대상의 꼬투리를 하나 잡았다 싶으면 언론은 온갖 사소한 내용과 풍문들까지, 심지어 근거 없는 댓글 내용들까지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부풀려 쏟아낸다. 물론 정확한 사실관계의 검증은 생략하기 일쑤다. 언론이 쏟아내면 정치권은 이를 정략적 비난의 소재로 무분별하게 활용한다.
언론과 정치권은 여기에 어김없이 공정과 불공정이라는 프레임을 들이댄다. 그러면서 어지러운 공방이 난무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정작 ‘갓차 저널리즘’과 ‘갓차 정치’가 입에 올리는 공정과 불공정 문제 시정을 위한 제도적 방안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와 고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무수히 널려있는 구조적인 불공정과 불평등은 외면한 채 뉴스수용자들과 정치적 추종세력의 분노게이지를 높이는 데만 혈안이 돼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사회 발전과 개선에 쓰여야 할 소중한 자원은 허비돼 버리고 만다.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는 다른 분야들과 달리 정치와 언론의 수준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여기에는 한 번 스캔들에 매몰되면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도록 만드는 ‘갓차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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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