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초대한다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이 상다리가 부러지건 아니건, 차린 쪽에서 내미는 손길은 항상 쑥스럽기 마련이다. 예전에 어느 지인께서 책 한 권을 내신 뒤 남들에게 전하는 손이 그처럼 쑥스러울 수 없었단다. 왜 고생해서 책을 만들어 놓고, 선물로까지 주면서 이처럼 쑥스러워 해야하는 것일까? 참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글 하나 조차 이름을 내걸고 쓴다는 일은 쑥스럽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에도 음악이라는 백하나 믿고 이처럼 뻔뻔하게 긴 난을 메꿔 오고 있지만 글이란 늘 쑥스럽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이번 바하의 ‘샤콘느’의 경우는 왠지 쑥스럽지가 않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동네방네 떠들고, 누구의 귓불을 붙잡아서라도 앉혀놓고 들려주고 싶은 곡이 바로 바하의 ‘샤콘느’이기도하다. 한마디로 나 자신이 이곡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인데, 물론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이 곡을 강제로라도 연습해야 했겠지만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그저 공짜로 들으면서 이처럼 은혜받은 경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것이 따따따! 하고 울리는 베토벤의 ‘운명’이라면 몰라도 단 한 대의 바이올린으로 이처럼 크나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바하가 만들어낸 기적이며, 아니 어쩌면 음악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바하의 ‘샤콘느’야말로 음악사에서도 절대 잊혀질 수 없는, 가장 감동의 순간으로 기록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기록되겠지만)
아무튼 힐링 음악으로 권하고 싶은 작품 중의 하나가 바로 바하의 ‘샤느’(chaconne)다. 물론 바하의 곡들은 모두 힐링 음악으로 안성맞춤이긴 하지만 특히 ‘샤콘느’는 바하를 대표한다고 할 만큼 꼭 들어봐야 하는 명곡이다. 이 곡은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으로서 파르티타 2번(BWV 1004)의 마지막 악장을 장식하고 있는 곡인데 연주시간은 약 15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곡이지만 수많은 바하의 작품에서도 선율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어떤 애절한 소망이 담긴 곡이기도하다. 혹자는 이 곡을 가리켜 죽은 아내 Barbara를 추모하여 쓰여진 곡이라고도 하지만 딱히 증명할 길은 없다. 다만 이 곡이 어떤 진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곡은 분명한데 슬프다면 슬프고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곡이며 추억에 잠기게 하는 서정적인 곡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바하를 만날 수 있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곡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음악을 가장 부흥시킨 민족은 독일 민족이었다. 아이러니는 그들이 말수가 적은 과묵한 민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독일민족에게 있어서 음악은 단순히 희노애락의 표현 수단이었을 뿐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는데 있어 중요한 소통수단이기도 했는데 절도있고 포괄적이며 은유적인 음악을 소유했던 독일민족은 지구상에서 가장 감정이 잘 단결된 민족이기도 했다. ‘독일’과 ‘음악’…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音樂이라는 한자어와 독일의 음악은 조금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즉 즐긴다는 측면에서는 분명 독일 음악과 일반 음악은 별반 다름없지만,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음악은 보다 영적으로 가까워진다. 오라토리오나 성가 등, 자신들의 신앙심을 음악으로 더 적극적으로 표현한 쪽은 로마교보다는 신교 쪽이었다. 아무튼 음악은 신앙의 또다른 표현이기도 했는데 종교개혁 이후 독일은 바로크, 고전 시대로 이어지며 음악국가로 발전하게 되었고 독일하면 음악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 속에 음악이 꽃피우게 된 것은 그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치유와 피안이 필요했기 때문이겠지만 특히 요즘처럼 힐링의 숲… 음악이 필요한 때도 없는지도 모르겠다. 자연 재해와 팬데믹은 물론이고 분열과 격돌의 시대에 음악과 같은 힐링의 탈출구가 없다면 세상은 점점 사막에 갇혀 숨막힐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나의 경우도 처음부터 바하의 음악에 꽂혔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바로크 형식은 너무 낯설게 들려오기도 했는데 어딘가 고답적이고 딱딱한 형식미가 귀에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시점에 스트레스가 찾아왔고 긴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때 바하의 ‘샤콘느’가 들려왔다. 당시만해도 나는 음악이라는 것이 늘 차원이 높은, 어떤 예술의 경지만을 추구하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바하의 음악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누구나 간직한 소박한 추억, 어린 시절의 감정, 마치 꿈 속에서 들려오는 고향의 소리같은 것이었다, 조용한 저녁 마을의 밥짓는 연기, 평화로운 농촌, 어머니의 자장가, 먼 여행지에서 들려오는 향수, 귀뚜라미 소리, 동무들… 이런 것들은 누구나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마치 자연이 들려주는 기도와 같은 것이기도했다.
샤콘느는 4분의 3박자의 느린 춤곡으로 원래 남아메리카에서 유래했다고한다. 신대륙 발견 뒤 유럽으로 전해졌으며 16세기 후반부터 스페인을 거쳐 퍼진 곡인데 마치 드보르작이 아메리카에서 느낀 것처럼, 수많은 음악들이 멜팅팟처럼 끓어오르던 한 시대에 있어서, 어딘가 이국적이면서도 향수를 자극하는 샤콘느라는 예술을 무릉도원의 어떤 도의 경지로 바라보았던 것은 단순히 바하 혼자만은 감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샤콘느는 이후 기악곡, 성악곡 등의 형태로 발전하면서 바하를 비롯 비탈리, 이루마, 패커벨 등이 명작을 남겼는데 비탈리의 작품 등이 어딘가 서글프고 처연한데 비해 바하의 곡은 다소 밝은 것이 특징이며 아무리 어지러운 마음으로 들어도 늘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일품이다.
음악(音樂)은 사람의 감정을 따스히 포옹하며 효과적인 소통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대화에 있어서는 말 실수나 오해 등으로 상처받는 경우에도 음악은 대립을 부채질하는 경우가 없다. 요즘처럼 한국, 미국 사회나 할 것 없이 갈등과 분열, 이분적인 생각들, 자신들도 모르게 격화되고 있는 감정의 상처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언어란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고 순화시킬 때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데 언어의 단점, 모순이 있기도 하다. 요즘의 경우처럼 힘들고, 분열의 시대에, 바하의 음악같은 힐링의 숲… 음악으로의 초대가 절실한 때도 없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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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