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에 1년반이 걸렸다. 마침내 지난 3월7일 멕시코 국경을 출발했다. 2,650마일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종주를 시작한 것이다. 115마일을 걸어 샌디에고 북쪽 워너 스프링스에 도착했다. 눈과 비바람 때문에 여기까지도 쉽지는 않았다. 3월19일 밤 PCT 협회(PCTA)에서 보내 온 이메일을 열었다. ‘PCT 운행을 중단하거나 연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코비드-19 때문이었다. 그 무렵 캘리포니아 주는 불필요한 외출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고, 코로나 확산 방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멀리는 노르웨이 등에서 온 하이커들과 모여서 의논을 했다. 바이러스 때문에 산행을 중단한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럴 때는 고립된 깊은 산이 더 안전한 것 아니냐”는 이들도 있었다. PCTA의 권고를 납득할 수 없다는 이들은 산행을 계속하겠다고 했고, 나머지는 텐트를 접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온 로렌 로릭(30)이 전하는 이야기다. 그녀는 일단 산행을 중단하고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다행히 가까운 오렌지카운티 샌 클레멘티에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웨스턴 켄터키대학을 갓 졸업한 테일러 프린트(22)도 켄터키로 돌아갔다. 3월18일 국경을 출발한 그녀는 산행 이틀째 밤에 PCTA 이메일을 받는다. 거의 10분 안에 캠핑장에 있는 모든 텐트에 일제히 불이 켜졌다. 하루 전 그녀와 함께 PCT를 시작한 하이커들이었다.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증단하느냐, 마느냐. 4년을 계획한 프로젝트였다. 준비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접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녀는 다음날 트레일을 떠났다.
바이러스는 산길도 비웠다. 코비드-19 때문에 첩첩산중의 등산로도 한가해진 것이다. PCT는 26개 국유림, 7개 국립공원, 5개 주립공원, 4개의 내셔널 모뉴멘트를 지나며 멕시코와 캐나다 국경을 잇는다. 매년 수 십만명이 찾는다. 하루 산행이나 구간을 나눠 며칠 백패킹을 하는 섹션 하이커들이 대부분이다. 지난해 PCTA가 발급한 500마일이상 장거리 산행 퍼밋은 8,000여 장. 올해는 수 백장에 그쳤다.
LA근교에서는 라이트 우드가 PCT 종주자들이 잘 들르는 마을이다. 출발 전에 이 동네 철물점에 소포를 부쳐 놓고, 식량과 연료 등 보급품을 챙겨 간다. 4월쯤 이 일대 PCT에 들어가면 행색은 남루하고 얼굴은 볕에 그을렀으나 눈은 맑게 빛나는 PCT 종주자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이들의 발길이 거의 끊겼다. 하이커들이 간단하게 몸도 씻을 수 있는 인근 공용 화장실은 굳게 문을 잠궈 놨다.
LA한인타운 북쪽의 액턴 캠핑장은 PCT 길목에 있는 시설 좋은 사설 캠핑장이어서 장거리 하이커들이 빠지지 않는다. 멕시코 국경에서 5주쯤 후면 여기 도착한다. 캠핑장 제너럴 매니저 조셉 신씨에 따르면 올해 3월부터 6월말까지 방명록애 이름을 남긴 PCT 하이커는 600여명. 보통은 한 해 5,000명 가까이 됐다고 한다. 한국인 등산객은 지난 4월 한 명이 거쳐 갔고, 한 사람이 더 산행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이러스가 산길을 막으면서 산골 마을의 비즈니스는 말이 아니다. 북가주 샤스타 마운틴에 있는 한 신발가게는 산행 중에 등산화가 헤어진 하이커들이 많이 찾는 곳. 예년에는 하루 15명 정도가 들렀으나 올해는 2~3일에 한 두명 들를까 말까할 정도. 어떤 까페는 ‘첫 맥주 공짜’라는 배너를 걸었으나 매출이 75% 떨어졌다. 섹션 하이커들이 많이 찾는다는 워싱턴 주의 한 시골가게는 지난해에는 방명록에 480명이 이름을 올렸으나 올해는 40명이라고 전한다.
지난달 중순 업데이트된 PCT 협회(www.pcta.org)의 공식입장은 장거리 산행은 식량 등 등산용품을 스스로 지고 갈 수 있을 정도까지만 하라는 것이다. 최대 일주일 정도가 된다. 그 이상을 가려면 중간 보급이 필요한데 접촉 과정에서 바이러스 전파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PCT와 함께 미국의 3대 트레일로 꼽히는 동부의 애팔레치안 트레일과 록키 산맥의 콘티넨탈 디바이드 트레일 연관단체들의 입장도 같다.
PCT 종주자들에게 보급품만큼 중요한 것은 산행 정보. 지나온 곳의 상황은 어떤지, 어디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하이커들이 올리는 생생한 현지 정보는 산행의 가이드 역할을 한다. 올해는 이같은 정보의 공유가 전면 차단됐다. 하이커들의 포스팅을 공유하고, 관리해주던 사이트들이 서비스를 중단한 것이다. 지금 PCT를 걷고 있는 사람들은 깜깜이 산행을 하고 있다.
PCT 하이커들을 돕는 자원봉사자로 잘 알려진 샌디에고의 한 부부는 지난해에는 1,200여명의 하이커들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고, 지난 15년간 수 백명을 자기 집에 데려와 잠자리를 제공했다. 하지만 올해는 이 ‘트레일 앤젤’의 역할을 중단했다. 3월초 8개월 된 딸을 업고 PCT 종주에 나선 한 20대 부부에게 숙소를 제공한 게 전부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내려온 이들이 들른 것은 봉쇄령이 내려지기 전이었다.
PCT종주는 ‘비필수적인 여행’이다. 지금같은 때 권장되지 않는다. 5~6개월은 야외에서 살기로 결심한 이들은 아파트를 빼고, 차 팔고, 직장을 그만 뒀다. 바이러스는 이들의 에너지와 시간과 돈, 무엇보다 PCT 종주를 결심하게 했던 어떤 절박한 사유들을 모두 허공에 날려버렸다.
<
안상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