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돈의 생명력

2020-08-19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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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코로나 및 여타 글로벌 보건 과제 대응에 한국정부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이 코로나19 백신개발을 주도하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대놓고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서한을 보낸 게이츠의 의중은 분명해 보인다. 게이츠는 강대국들이 백신을 독점하기 위해 이기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명해왔다. 게이츠는 평소 백신 혜택이 특정 국가들만이 아닌, 인류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해왔다.

이런 소신에 따라 그는 여러 나라의 코로나19 백신개발과 생산지원에 거액을 쾌척해왔다. 수혜자들 가운데는 한국 기업도 있다. 또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되면 빈곤국을 대상으로 백신 1회당 3달러 미만에 공급이 되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니 “백신은 인류의 공공재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해온 문 대통령에게 게이츠가 서한을 보내 협력을 요청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게이츠에게는 오만하고 짜증 많은 ‘독점 자본가’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의 시야는 자신의 기업 너머 세계로 점차 확장됐다. 아내와 함께 재단을 설립해 공익, 특히 가난한 나라의 보건과 위생 개선을 위한 사업에 몰두해왔다. 스스로를 ‘불평등을 줄이려 노력하는 참을성 없는 낙관론자’라 지칭하는 게이츠가 지금까지 기부한 돈은 500억 달러가 넘는다.

좋은 머리로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보건과 위생에 관한 그의 식견은 전문가 수준을 넘어섰을 정도다. 그는 이미 지난 2015년 “팬데믹이 핵전쟁보다 인류에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며 바이러스의 창궐을 예견한 바 있다.

새로운 경제 질서 속에 부의 순위가 재편되면서 게이츠는 이제 더 이상 세계최고의 부자가 아니다. 하지만 부의 사용을 통해 인류의 삶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 면에서는 게이츠가 단연 최고다.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이 심화되면서 자본주의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게이츠처럼 자신이 갖고 있는 재산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있는 부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희망적인 징표다. 얼마 전에는 수퍼리치 83명이 공동서한을 통해 “코로나19에서 전 세계가 회복되려면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 만큼 부자 과세를 통해 이를 마련해야 한다”며 “정부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당장, 상당히, 영구적으로 세금을 올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런 부자들을 보면서 돈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돈은 그 자체로는 무생물이다.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것은 인간이다.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잘 배분되고 선한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는 돈에는 생명력이 넘친다. 하지만 은행계좌나 모니터에서 잠자며 주인의 머릿속 허영만 만족시켜주는 돈에는 아무런 생명력이 없다.

다른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내놓는 수퍼리치들의 실천이 종교적 각성에서 나온 것은 아니겠지만 으뜸 가르침인 종교들 역시 이런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삶의 중요한 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부를 내 집밖에 쌓아놓는 것을 ‘바라밀공덕’이라 부른다. 기독교에서는 보물을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쌓아두라고 가르친다. 표현은 조금 달라도 메시지는 같다. 이런 가르침에 귀를 닫은 채 돈을 집안에만 쌓아놓는 사람들은 모으려고만 하지 버릴 줄은 모르는 저장강박증 환자와 다름없다.

흔히들 돈으로는 행복을 살 수 없다고 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실험을 통해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는 확실하고도 간단한 방법이 확인됐으니 말이다. 그 방법은 “다른 이들을 위해 쓰는 것”(Give it away)이다.

문제는 적은 돈일 때는 실천이 쉬워도 큰돈일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액수를 다른 이들을 위해 서슴없이 내놓는 수퍼리치들의 공력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들이 이런 실천을 통해 느끼는 기쁨 또한 그만큼 크리라 짐작해 본다. 돈만 많은 부자는 부럽지 않은데 돈에 생명을 불어넣을 줄 아는 괜찮은 부자가 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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