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호박덩굴

2020-08-01 (토) 송윤정 금융전문가
크게 작게
코로나 사태로 집에 갇혀 지내면서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나도 그중 하나다. 매일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나는 남편과 함께 우리 개, 턱스를 데리고 산책을 나선다. 종일 집에 갇혀있던 턱스는 산책 갈 시간 즈음이 되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기대에 찬 눈으로 올려다본다. “산책 가자!”하고 부르면 꼬리가 빠질 지경으로 흔들어대며 신이 나서 점프를 한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이어도 마치 일생에 처음 횡재를 만난 듯 이렇게 신이 날까.

집 앞을 나서 조금만 걸어가면 맥클린 매너(MCLEAN MANOR)라는 공원이 나온다. 인적이 드문 공원 입구에서 턱스의 목줄을 놓아주면 턱스는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다. 그 경쾌한 흔들림은 풀 향기와 어울려 왈츠를 추는 듯하다.

풀이 우거진 포장되지 않은 오솔길에 서면 대학시절 유럽에 배낭여행을 갔을 때 걸었던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이 떠오른다. 나의 산책로는 그 유명한 하이델베르크의 길처럼 유유히 흐르는 강, 유서 깊은 다리와 도시의 정경은 없지만, 그 길처럼 호젓한 길을 따라 온갖 풀과 나무가 가득하고 개울물이 흐르는데 그 위로 작은 다리가 하나 있다. 동화책 ‘곰돌이 푸’에서 크리스토퍼 로빈과 푸가 막대를 던져 누구 막대가 더 멀리 가나 바라보았던 다리처럼 조그마하지만, 동심을 일깨우는 풍경이다.


이 동네 산책은 목적지 없이, 출발한 자리로 되돌아오는 순환의 산책이다. 생각도 내려놓고 걸음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며 새소리, 바람, 들꽃, 살랑이는 나뭇잎이 순간순간 내게 던져주는 세상을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바라본다. 봄부터 이 길을 걸으며 신기한 야생 꽃, 나무에 달린 꽃을 보며 그 이름이 궁금해 휴대폰에 사진을 찍으면 화초의 이름을 알려주는 앱도 깔았다. 꽃, 나무, 때로는 남편 혹은 내가 모델이 되어 사진도 찍고 제멋대로 달리는 턱스를 몇 번 부르다보면 공원 산책길을 빠져나와 동네 상가를 만난다. 그 상가 길을 돌아 다시 반대편 공원 입구로 들어와 놀이터와 개울가를 지나 공원을 빠져 나오는 것이 나의 산책로이다.

열흘 전 즈음 한 상가 건물 앞 길가 언덕진 화단 끝자락에 콘크리트 인도와 만나는 곳에 잡초처럼 삐죽이 나와있는 풀이 눈에 들어왔다. 작고 노란 꽃망울이 수줍은 듯 숨어 있었다. “어머, 호박꽃이네!” 예상치 못한 곳에 뿌리를 내린 호박꽃을 보며 신기해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그 호박 줄기는 날마다 쑥쑥 자라 며칠 지나니 초록 잎이 보름달만 하고 늘어진 마디는 뜨거운 콘크리트 바닥으로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잡초인 줄 알고 사람들이 밟아 죽이지는 않을까? 어쩌다 이런 곳에 뿌리를 내렸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옆에서 걷던 남편에게 말했다. “걱정되면 뿌리째 파서 가져다 우리 마당에 심어.” 나는 농담을 하는 건가 싶어 그를 보았다. “잡초라도 내 땅이 아닌 곳에 있는 걸 뽑으면 잡혀가는 나라 아니야? 한국 사람들이 공원이나 산에서 나물 캐다가 잡혀가곤 한다며?” 그는 덤덤히 말했다. “남 안 볼 때 가져가면 되지. 어차피 여기 있으면 곧 죽겠구먼.” 그렇다고 자기가 파서 가져다 심어주겠다든지, 하다못해 망을 봐주겠다든지, 빈말이라도 그런 말은 한마디도 없이.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어린 호박 덩굴이 마음에 걸린 나는 토요일 이른 아침에 연장을 챙겨 나섰다. 마치 007 영화를 찍는 것처럼 차를 몰고 가 그 호박 덩굴 바로 옆에 세워놓고 나는 서둘러 작업을 시작했다. 콘크리트 바로 옆에 뿌리를 내려서 그런 건지, 호박은 원래 그렇게 뿌리를 얇게 내리는 건지, 작은 삽을 넣으니 쉽게 뿌리째 나왔다.
가져간 봉지에 담고 서둘러 일어서려고 하는데 그 옆에 또 한 뿌리가 있었다. 그렇게 두 뿌리의 호박 덩굴을 챙겨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와 뒷마당으로 갔다. 양지바른 두 곳에 각각 심은 후 물을 듬뿍 주고 흐뭇한 표정으로 호박 덩굴 사진도 찍었다.

옮겨 심은 날 저녁에 보니 두 호박의 잎이 모두 축 늘어져 마치 죽어가는 듯했다. 괜히 옮겨다 심어 둘 다 죽이는 것이 아닌가. 사람도 남의 땅에 와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 죽을 듯 힘겨운 일인데 식물인들 어찌 안 그럴까. 그래도 생명의 힘은 얼마나 끈질긴가.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호박 덩굴을 들여다보니 노란 꽃을 활짝 피우고 나를 보며 웃는다. 살아주어서 고맙다.

<송윤정 금융전문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