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뒷심 부족 주지사

2020-07-30 (목)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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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평생 공화당원이었다. 외출하시지 말고, 꼭 나가야 한다면 반드시 마스크를 하시라는 딸의 말을 귓전으로 들었다. 감염 위험을 강조하는 딸은 아버지와의 논쟁에서 지고 있음을 알았다. “대통령과 주지사, 케이블 TV 뉴스가 다 한 목소리인데 내가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느냐”고 딸은 반문했다. 그 아버지가 지난달 코비드-19로 숨졌다. “아버지는 트럼프와 주지사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들의 말은 다 믿었다. 그런 아버지를 그들이 배신했다”고 딸은 말한다. 애리조나의 한 부녀간에 있었던 일이다.

애리조나는 텍사스, 플로리다와 함께 최근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는 지역이다. 모두 공화당 주지사가 이끄는 공화당 주라는 공통점이 있다.

주지사의 소속당이 문제라면 캘리포니아는 왜 그런가. 압도적인 민주당 강세주, 공화당은 발붙일 곳도 마땅치 않은 주가 아닌가. 왜 그런 캘리포니아가 뉴욕을 넘어 확진자 최고 기록을 날마다 갱신하고 있는가. 캘리포니아의 코비드-19 감염자는 47만명을 넘었다. 지역단위로는 브라질의 상파울로보다 불과 1만여명 적은 세계 2위에 올라있다. 트럼프 집권 이후 극명해진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코로나 확산의 주요 원인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캘리포니아는 코비드-19 대응에서 칭송받던 주였다. 초기 대응 당시에는 모범주로 꼽혔다. 개빈 뉴섬 주지사는 과단성 있게 대처에 나섰다. 지난 3월19일 스테이 앳 홈, 자가대피령을 내렸다. 미국에서는 처음 내려진 조처였다. 거리두기가 강조되고, 비필수업종에는 영업 중단령이 내려졌다. 일일 생방송 브리핑을 통한 주지사의 메시지는 구체적이고 명료했다. 의료진 사이에서는 주지사의 발빠른 대처 덕에 캘리포니아의 코로나 확산은 이 정도에 그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문을 닫아 건 주지사는 단계적인 정상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자가 대피령 해제와 경제활동 재개에 필요한 선결 요건들을 제시했다. 그 계획 대로면 비필수 업종의 순차적인 영업 재개와 정상화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규제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풀리기 시작했다. 5월부터 느슨해졌다. 술술 규제가 풀려 나가면서 지난달 중순부터 LA 식당의 실내영업과 술집 영업도 재개됐다. 규제 해제 다음날 LA의 술집과 식당에는 50만명이 몰렸다고 워싱턴포스터지는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해는 된다. 대통령은 연일 경제 정상화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업계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러다 경제를 망치면 어쩔 것인가. 상황은 좋아지고 있다는데 캘리포니아만 닫아둘 것인가.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하지만 판단 미스였다. 뒷심이 부족했다. 규제를 더 밀고 나갔어야 지금의 확산을 피할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가 최고의 핫 스팟이 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저소득 이민자의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필수업종 종사자가 많은데다, 밀집 주거환경인 이들이 코비드-19 직격탄을 맞았다. 라티노 이민자의 감염률이 월등히 높은 것은 서부 주들의 공통된 현상이다.

오리건과 워싱턴 주는 라티노 주민이 각각 13% 정도지만 감염자는 전체의 40% 내외를 차지하고 있다. 라티노 인구가 40%가 채 안되는 캘리포니아도 감염자의 55%가 이들이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센서스 트랙을 조사한 결과, 비 라티노 주민의 감염률은 0.2%인 반면 라티노 주민 감염률은 3.9%로 20배 정도 높았다고 UC 샌프란시스코의 한 전염병 전문가는 발표했다.

캘리포니아는 특히 교도소가 심각했다. 수감자 감염은 교도소 내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들로 인해 그 지역 병원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무더기 감염된 직원들은 퇴근하면 그들의 동네로 돌아왔다.

샌프란시스코 북쪽 샌 퀜틴 교도소는 수감자의 60%가 감염됐다. 감염된 직원도 200명 가까이 됐다. 살얼음판을 걷고 있긴 했으나 지난 6월초만 해도 샌 퀜틴은 무감염 지대였다. 하지만 치노의 교도소에서 120여명의 재소자가 이송되어 온 후 상황은 급변했다. 당시 치노 교도소는 감염의 핫 스팟. 그후 코비드-19는 말 그대로 들불처럼 샌 퀜틴에 퍼져나갔다. 코비드-19의 와중에 이뤄진 무분별한 이송 조처들이 교도소 확산의 불쏘시개가 됐다. 책임을 물어 주 교정당국의 최고 의료책임자는 경질됐다.

뉴섬 주지사는 지난 6월18일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다. 하지만 한 번 풀린 분위기는 다잡기 어려웠다. 몇몇 카운티 셰리프는 이 지시를 거부했다. 오렌지카운티의 헌팅턴 비치는 반 마스크 캠페인의 중심지가 됐다. 술집 문을 도로 닫을 것을 명령했으나 프레즈노 카운티 등은 따르지 않았다.

캘리포니아는 너무 일찍 무장을 내렸다. 주지사와 LA 시장 등에게는 난세의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인 뚝심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런 주지사에 대한 책임론은 의외로 거론되지 않는다. 유력 언론 대부분이 반 트럼프의 진보성향이어서인가. 트럼프와 공화당 비판에는 그렇게 날카롭던 칼날이 민주당 주지사에 이르러서는 무뎌졌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공화당 주지사들이 보면 아주 불공평할 것이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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