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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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파우치

2020-07-23 (목)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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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앨러지 & 전염병 연구소장인 앤소니 파우치 박사는 공무원이다. 그에게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체제 내 학자의 한계랄까, 그런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코비드-19의 실상을 호도하는 엉뚱한 진단과 대처방안에 대한 그의 반응은 지나치게 온건하게 보였다.

“아니오”라고 이야기해야할 때 ‘아니오’라는 말을 피해 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정부기관이 아니라 대학이나 민간 연구기관에 몸담고 있었어도 그랬을까. 그랬다면 더 좀 똑 부러지게, 알기 쉽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나는 것은 검사 건수가 많아져서 그렇다는 주장이나, 감염자의 99%는 완전히 무해하다는 완전한 거짓말 등은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갈 일들이 아니었다.

말의 단호함이 지나쳐 부러지기 일쑤인 한국 정치판 같은 곳의 어법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닥터 파우치의 말은 더 답답하게 여겨졌을지 모른다. 물론 과학의 언어와 정치의 언어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곡선을 그리는 어떤 어투에서는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코비드-19 시대에 대처하는 책임있는 실무 당국자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더라도 역사에 기록될만한 어록을 쌓아가고 있는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에게 확실하게 “노”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그의 온건한 화법에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백악관은 이런 닥터 파우치도 참지 못했다. 최근 2주 새 코비드-19 정국에서 가장 관심을 모은 사안 중 하나는 정치와 과학의 갈등이었다. 수면 아래 있던 대통령의 재선 전략과 과학적 실체 간의 첨예한 대립이 터져 나온 것이다.

갈등이 표면화되고, 파장이 확산된 과정은 이미 보도된 대로다. ‘백악관이 미국의 최고 전염병 권위자를 사실상 퇴출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그를 두고 ‘백악관에서는 투명인간’이라는 보도도 이어졌다. 그를 희화화한 만화를 페이스북에 올린 보좌관도 있었다. 대통령 측근의 파우치 때리기는 이어졌다. USA 투데이에는 그를 폄훼하는 백안관 고위 경제 보좌관의 기고도 실렸다. 뒤늦게 백악관은 불화설을 봉합하는 모양새를 보였지만 근본적으로 진화되거나 봉합될 수 있는 성격의 불화가 아니었다.

연방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소장 출신의 전직 고위 보건관료 4명은 얼마 전 워싱턴포스터지에 “어떤 대통령도 트럼프처럼 과학을 정치화한 사람은 없었다”는 공동 기고문을 게재했다. 이들은 기고문에서 “우리 네 사람은 공화당과 민주당 정부에서 15년이상 CDC를 이끌었지만 정치적인 압력에 의해 과학의 증거가 바뀌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며 트럼프 정부의 과학 왜곡을 질타했다.

지금 코비드-19의 최대 확산국은 미국이 1위, 브라질이 2위를 달리고 있다. 미국의 확진자는 400만명을 향해 가고 있고, 브라질은 200만명을 넘었다. 두 나라가 전 세계 확진자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사망자도 미국이 14만여명, 브라질은 8만여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3분의1을 훨씬 넘는다.

이런 두 나라는 공통점이 많다. 대통령들이 모두 사태의 심각성을 부인하거나 저평가하면서 국민보건보다 경제를 더 걱정하는 것 같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코로나를 계절성 독감 정도로 여기는 것도 같았다. 말라리아 약인 하이드록시 클로로퀸이 코비드-19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발표했고, 기본적으로 마스크를 기피해왔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브라질 대통령은 그 자신이 이달 초 코비드-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그는 양성 판정을 받은 사실을 공개하는 회견에서도 마스크를 벗었다. 이런 대통령에 대해 브라질의 한 주지사는 “우리는 코로나와 대통령이라는 2개의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미국의 코로나 확산 사태를 세계는 충격 속에 지켜보고 있다. 도대체 미국이 왜 이런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전문가들은 미국사회가 처한 정치적 양극화와 부실한 공중보건 시스템, 쪼개져있는 정부조직과 계층 간의 불평등 등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무엇보다 위기대처에 무능한 리더십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 나라와 국민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 굳이 역사적 교훈만은 아니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대로 대처했더라면 죽지 않아도 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실종된 리더십 때문에 많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나마 곯아있던 백악관과의 갈등이 터져 나온 후 닥터 파우치가 오히려 더 당당하고 직설적으로 과학적 소신을 펴고 있는 것은 인상적으로 보인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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