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도덕 감정을 다룬 책으로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조너선 하이트 교수의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에는 도덕은 과연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가라는 질문과 관련한 흥미로운 사례가 소개돼있다. 이 사례는 “이성적 추론 능력은 도덕적 진실에 이르는 왕도이며, 이성적 추론을 훌륭히 할 줄 아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행동할 확률이 높다”는 합리주의자들의 믿음을 검중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이트 교수가 거론한 내용은 철학자 에릭 슈비츠게벨이 도덕철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였다. 만약 이성이 도덕을 지배한다면 매일 도덕과 윤리를 연구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를 설파하는 도덕철학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한다. 슈비츠게벨은 설문과 관찰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도덕철학자들이 얼마나 자선을 베풀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리는지, 또 장기기증과 헌혈을 하는지 살펴봤다. 또 컨퍼런스가 끝난 후 자기 손으로 뒷정리를 하는지와 학생들 이메일에 얼마나 성실히 답장을 해주는지도 조사했다.
조사 결과 도덕철학자들이 다른 분야의 교수들보다 나은 점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수십 곳 도서관을 돌며 유실된 도서목록을 모아봤더니 윤리학 관련 학술서가 타 분야 도서들에 비해 도난당하거나 영구히 반납되지 않는 확률이 훨씬 높았다. 결론은 도덕적 추론에 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실제 도덕적 행위와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도덕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직업군은 성직자들이다. 항상 도덕과 윤리에 대해 옳은 말만 하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설파하는 성직자들은 과연 일반인들보다 더 깨끗하고 고결한 삶을 살고 있을까? 비단 성직자들뿐 아니라 하이트 교수가 예로 든 도덕선생들, 어쩌면 바른 말 하기 좋아하는 언론인들을 상대로도 같은 질문을 던져야하지 않을까 싶다.
수많은 교인들의 신망을 얻던 유명 성직자들이 성추문과 탐욕 때문에 한순간에 무너지는 일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도덕에 관한한 ‘지행일치’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시카고 지역의 메가 처치인 윌로우크릭 교회 빌 하이벨스 목사 케이스가 대표적이다. 성공한 목회자로 교계의 두터운 신망을 받던 하이벨스 목사는 여신도들과 사역자들에게 부적절한 성적 행위를 해온 사실이 드러나면서 2년 전 교회를 떠나야 했다. 평생 일궈온 성공과 평판을 한순간에 날렸다.
도덕적으로 존경받아온 인물이 부도덕한 행위로 인해 몰락하는 일은 다반사이다. 그럴 때마다 위선과 이중성에 대한 세간의 비난과 손가락질이 이어진다. 도덕을 가르치거나, 도덕성을 자산으로 해 커리어를 일궈온 인물들이 자주 빠지게 되는 인지적 함정은 “나는 이미 충분히 도덕적이기 때문에 덜 도덕적 행동을 해도 괜찮다”는 착각이다.
사회심리학자들이 ‘도덕적 면허(Moral Licensing) 효과’라고 부르는 심리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스스로 도덕적 행동을 했다고 여기면 다음에 비도덕적 행동을 할 때 마음의 짐을 덜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생각은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머릿속에 자리 잡는다. 그래서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권력이 더해지면 정말 위험해진다. 도덕적 타락을 초래하기 쉬운 것은 물론 그런 도덕적 일탈을 드러내는 일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의 위치에 올라있는 ‘도덕적 인물들’의 추문 규명이 난항을 겪거나 유야무야되곤 하는 것이다.
하이벨스 목사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의혹이 오래전부터 제기됐음에도 조사를 담당한 교회 장로들은 목사의 말만 믿었다. 장로들은 “하이벨스 목사에 대해 갖고 있던 신뢰라는 렌즈를 통해 피해 주장을 들여다보는 바람에 판단이 흐려졌다”고 고백했다. 작고한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으로 고소한 전직 비서도 시 관계자들에게 피해사실을 호소하자 “우리 시장은 그럴 분이 아니다”라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밝혔다.
도덕성을 브랜드로 권력의 위치에 오른 사람일수록 스스로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일에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 자칫 방심하는 순간 ‘도덕적 면허’를 받았다는 착각이 무의식 속으로 훅 치고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라는 역설적 명제의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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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