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까지만 해도 백악관 수성이 무난할 것으로 보이던 트럼프의 재선행로에 빨간불이 커졌다. 대선의 향방을 좌우할 ‘경합 주’들은 물론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해 온 ‘텃밭 주’들에서까지 상대인 바이든에 뒤지거나 고전하고 있는 것으로 여론조사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했던 유권자들 가운데 17%는 더 이상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6월 여론조사에서 응답했다. 코로나19 통제 실패와 이로 인한 경제악화에 전통적 지지층마저 등을 돌리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제라도 코로나19를 적극적으로 수습하면서 경제를 개선시키는 일을 고민하고 이에 매진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을 때도 문제의 심각성을 외면하거나 축소하는 데만 급급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다. 반면 조그만 긍정적 지표나 성과만 나와도 자화자찬을 늘어놓기 바쁘다. 자신의 무능 때문에 희생당한 무수한 국민들에 대한 연민이나 안타까움은 찾아볼 수 없다.
독립기념일을 맞아 행한 여러 연설에서도 시종 “우리는 급진좌파와 마르크스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선동가, 약탈자, 그리고 많은 경우에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을 격퇴하는 과정에 있다”며 민주당과 인종차별 시위를 비난하는 데만 집중했다. 분열과 선동의 언어만 있을 뿐 애도와 통합의 메시지는 실종됐다.
대선을 3개월 반 남긴 시점에서 트럼프는 자신의 전략을 보다 더 분명히 하고 있다. 어차피 폭넓은 지지는 그의 정치적 버킷리스트에 올라 있지 않다. 제한된 골수지지자들의 총력동원을 통한 ‘신승’만이 유일한 현실적 목표이다. 그의 입장에서 올바른 국정운영과 제대로 된 정책으로 대선 이전에 미국을 정상 회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전통적 지지자들의 이반현상을 막고 이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그가 차용한 전략은 ‘문화전쟁’이다. 치적이나 성과를 앞세우기보다 지지자들의 감정과 정서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문화적 긴장감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것이다.
이런 전략은 ‘캔자스 방식’이라 부를 수 있다. 한 때 진보적 성향이 강했던 캔자스 주를 극우의 본산으로 탈바꿈시킨 것이 바로 이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미 대륙의 한가운데 위치한 캔자스는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시대까지만 해도 실용적 중도주의를 유지하던 주였다.
그러던 곳이 1990년대부터 극우에 점거된다. 신자유주의의 여파로 주 경제가 망가진 상황에서 극우는 낙태를 이슈로 한 ‘문화전쟁’을 벌인다. 1991년 여름 ‘자비의 여름(Summer of Mercy)’이라 불린 대대적인 낙태반대 운동이 캔자스 전체를 휩쓸었다. 이 운동을 이끈 공화당 강경파가 주 의회를 장악하면서 캔자스는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자리매김했다. 흥미로운 것은 경제가 망가질수록 보수화의 색채가 더욱 짙어져왔다는 사실이다. 캔자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정당인 공화당에 투표하는지와 관련한 실증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보수우파는 지지층의 도덕적·문화적 분노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이것을 통해 정치적인 에너지를 만들어간다. 이들에게 ‘문화전쟁’을 통한 분열 조장은 분노를 자극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 된다. 트럼프가 백인들의 공포를 부추기며 통합이 아닌 분열의 메시지에 골몰하고 있는 이유다.
캔자스 사례는 코로나19로 미국경제가 파탄이 난다해도 트럼프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백인 저학력 저소득층의 지지는 오히려 더 견고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문화적으로 처 부셔야할 적을 앞에 두고 경제적 처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트럼프는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욕을 먹으면서도 계속 선동적이고 과장된 언어로 새로운 적을 만들어내는데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지금의 여론조사에 기대 11월 대선을 안일하게 전망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4년 전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가 연루된 여러 스캔들이 터져 나왔을 때도 얘기한 것이지만 결코 트럼프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미국은 거대한 캔자스가 될 것인가. 그 대답은 오로지 유권자들만이 할 수 있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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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