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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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이 이끈 만학

2020-07-02 (목)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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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영(53) 씨는 이번 학기에 USC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만학이라고 할 수 있다. 코비드-19 때문에 버건디 후드를 두르고 갖는 정식 학위 수여식은 후에 갖기로 했으나, 지난 5월 온라인 졸업식을 가졌다.

주위에는 현대감각의 세라믹 아티스트, 도예작가로 알려진 그가 이번에 전공한 것은 세라믹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교육기관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것이었다. 쉰이 다 돼 박사과정에 들어가 3년여 간 일주에 이틀은 강의에 출석하고, 준비한 논문이 통과되면서 목표를 이뤘다.

지금 와서 꼽아보니 그녀는 지난 20여년 간 7개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그 연배의 많은 사람이 대학 한 곳에, 전공 하나가 보통이라고 보면 그의 삶은 독특하다. 전공도 인테리어 디자인, 정치학, 파인 아츠, 한의학, 교육학 등으로 다양했다.


전공을 택할 때마다 계기가 있었겠으나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배움의 인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것도 많았다. 아기 엄마가 아이를 키우면서 미국에서 대학공부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지만 우선 학위 논문의 내용부터 궁금했다.

그의 논문은 가칭 LA 아츠 & 테크놀러지 하이스쿨(LAATS)이라는 차터 스쿨 설립에 관한 것이다. 9~12학년 과정의 종합 예술학교를 설립해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청소년들에게 예술과 컴퓨터 등 테크놀러지 교육 기회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그는 칼스테이트 LA에서 강의를 하면서 예산 때문에 아트 클래스가 사라지고, 어떤 계층에게는 접할 기회조차 없게 되는 현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예술이 줄 수 있는 영감과 창의력, 꿈과 비전도 함께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예술 교육을 특화한 차터 스쿨 설립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나름대로 조사를 했다. 이 꿈을 체계적으로 현실화하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함을 느꼈다. 뒤늦게 USC의 문을 두드린 동기였다.

그는 학교생활을 통해 막연했던 꿈이 구체화됐다고 한다.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박사학위 동기들의 의견이 큰 도움이 됐다. 다양한 전문분야와 교육 현장의 경험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서 값진 조언과 정보를 많이 얻었다. 특히 테크놀러지의 미래와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학교 운영에 온라인을 적극 도입해 하이브리드 형으로 하는 데 대한 아이디어도 갖게 됐다.

그는 외국 유학에 대한 꿈은 어릴 적부터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고교 교육이 닭장에 갇힌 듯한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한 후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어학 코스부터 시작해 인문학으로 유명한 파리 3대학, 소르본느에 진학했다. 전공은 정치학으로 바꿨다. 하지만 소르본느 유학은 2년여 만에 접어야했다. 집안 일 때문이었다. 그때 못다 한 공부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

95년 미국에 온 후에는 나이 서른에 커뮤니티 칼리지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파인 아츠. UC 버클리에서 학부를 마쳤다. 그 후 집 가까운 칼스테이트 LA에서 파인아츠 분야에서는 최종 학위인 MFA를 받고, 대학 강단에도 섰다. 그 사이에 동국대 한의과대학도 졸업했다. 30대에는 거의 공부에 빠져 지냈다고 한다.

긴 공부의 여정에 일단 마침표를 찍은 이번 박사학위의 논문심사가 끝난 뒤 심사위원인 교수가 학위를 마친 소감을 물었다. 50초 시간을 줬다.


“감사하다. 공부를 하면서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박수영 박사의 원래 계획은 졸업과 동시에 차터스쿨 설립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차터스쿨은 주 교육부 기금이 지원되는 프로젝트여서 제출해야 되는 설립 계획서만 200페이지가 넘는다. 설립 취지부터 구체적인 운영계획까지 다 담아야한다. 일년에 한 차례 8월에 신청을 받는다. 그런데 그것도 올해는 코비드-19 때문에 취소가 됐다. 1년을 더 기다려야만 한다.

원래 계획대로면 한창 설립 계획서 작성에 몰두할 때지만 1년 시간이 남은 만큼 아트 스쿨 설립 프로젝트에도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LA가 아닌 타지역을 대상으로 할 수도 있고, 차터 스쿨이 어렵다면 사립학교로 전환도 모색하는 등 가능한 모든 경우를 열어놓고 있다.

학교를 세운다고 해서 그가 교장을 할 것도, 돈을 벌 것도 아니라는 이 프로젝트, 50대 이민 1세 아티스트의 이 비전이 결실을 맺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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