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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

2020-06-09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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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감독 스파이크 리의 1989년 영화 ‘옳은 일을 하라’(Do the Right Thing)는 찌는 듯이 더운 여름날 브루클린의 흑인동네가 배경이다. 모두가 게으르고 무위도식하는 이 동네에서 열심히 일해 돈을 버는 곳은 이탈리안 가족이 운영하는 피자집과 한인 부부가 운영하는 야채가게뿐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100도가 넘는 폭염에 인종갈등이 폭발하면서 싸움이 붙고, 출동한 백인경찰이 흑인을 목조르기하여 사망하자 폭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4.29폭동을 3년전에 예견했다고들 하는 이 영화는 사실 ‘목조르기’에서 지금의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더 닮아있다.

‘말콤 X’ ‘모 베터 블루스’ ‘정글 피버’ ‘블랙클랜스맨’ 등의 영화로 유명한 스파이크 리는 흑인 저항운동의 최일선 지도자로 꼽힌다. 그 스파이크 리의 영화제작사 이름이 좀 특이하다.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Forty Acres and a Mule Filmworks).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이 문구를 모르는 흑인은 한 사람도 없다.


‘가구당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는 남북전쟁 이후 해방된 400만 흑인들에게 나눠주기로 약속된 보상이었다. 긴 세월의 노예노동에 대한 물리적 보상차원에서 1865년 1월 윌리엄 셔먼 장군이 내린 특별야전명령 15호에 명시됐다. 당시 휘하에 1만여 흑인병사들이 있었던 셔먼 장군은 흑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자유뿐만 아니라 토지라는 사실을 알고 이 조치를 취했다. 자유를 얻어도 자립할 경제력이 없으면 다시 백인 지주에게 예속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 잠깐 시행되었던 이 명령은 그해 4월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남부출신 부통령 앤드류 존슨에 의해 바로 폐지되었다. 이미 수만명의 흑인들에게 배분됐던 땅도 다시 압류됐다. 자유인이 되었지만 경작할 토지 한 뼘이 없었던 흑인들은 결국 백인들의 소작인이 되어 노예보다 비참한 삶을 살게 됐다. 노예는 지주가 최저생활이라도 제공해주지만 소작인은 비빌 언덕 없이 죽어라 노동하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는 흑인들이 마땅히 받아야했던 보상의 상징이자 백인들에 대한 원한과 배신감을 상징하는 문구가 되었다.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저지른 셀 수 없이 많은 잔혹사 가운데 기억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지금으로부터 99년전 일어났던 ‘털사 인종학살’(Tulsa race massacre)이 그것이다.

20세기 초 오클라호마 주 털사의 그린우드 디스트릭에 ‘블랙 월스트릿’이라 불리던 흑인 부촌이 있었다. 노예해방 직후부터 법적 제도적으로 차별해온 인종분리정책(‘짐 크로법’)에도 불구하고 수십년이 지나면서 극빈층에서 탈출하여 경제적 번영을 이룬 흑인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1905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이 경제구역은 그로서리, 이발소, 호텔, 부동산업소를 비롯해 개업 의사와 변호사들, 신문사와 학교가 있을 정도로 번창한 상업지구였다.

‘블랙 월스트릿’을 백인들이 좋아했을 리 없다. 1921년 5월31일 메모리얼 데이, 아주 작은 사건 하나가 뇌관을 당겼다. 19세의 흑인 구두닦이가 흑인전용 화장실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낡은 엘리베이터가 흔들리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17세 백인 안내양의 팔을 잡았고, 소녀가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간 해프닝이 그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백인들은 총으로 무장하고 그린우드를 습격, 살인과 방화와 약탈을 저질렀다. 각지에서 기차와 자동차를 타고 몰려든 수천명의 백인들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총격전을 벌였고, 10여대의 비행기가 상공을 돌면서 폭탄과 테레빈 화염볼을 퍼부어 건물들을 불태우고 총기를 난사했다.

불과 이틀 동안 35개 블록의 건물 1,200여채가 잿더미가 됐다. 약 300명이 목숨을 잃었고, 8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1만여 흑인이 집을 잃었다. 백인들이 일으킨 이 폭동은 그 이후 흑인들이 일으킨 모든 폭동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희생과 피해를 낸 미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었지만 조사는커녕 곧바로 덮이고 위장된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떠났고, 그린우드는 다시 복구되지 못했다. 이 사건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1996년, 오클라호마 진상조사 위원회가 발족됐고 2001년 보고서가 발표됐다. 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내년 2021년은 ‘털사 인종학살’ 100주년이다. 이를 앞두고 뮤지엄 건립, 책 출간, 다큐멘터리와 영화 등 여러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그중에는 NBA 레이커스 스타 르브론 제임스가 제작하는 다큐멘터리도 있고 오프라 윈프리가 만드는 미니시리즈도 있다.

만일 링컨이 암살당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털사 인종학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현대 미국의 가장 큰 난제가 해결됐을지도 모른다. 흑인들은 땅을 일구어 일찍이 자립했을 것이고, 백인들은 노예제도의 ‘원죄’를 조금이나마 보상함으로써 죄의식을 덜 수 있었을 것이며, 블랙 월스트릿을 통한 흑인 경제력의 성장이 미국 흑백갈등의 양상을 크게 바꿔놓았을 것이다. 역사의 물줄기는 종종 이렇게 한가지 사건만으로 전체 방향을 돌려놓는다. 흑인들의 뼈에 사무친 억울함, 집단적 트라우마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해야겠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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