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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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의 적

2020-06-04 (목)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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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바이러스가 미 전역을 동시에 덮쳤다. 하나는 코로나바이러스, 또 하나는 인종차별이라는 바이러스다. 코로나 앞에는 ‘신종’이라는 말이 붙는다. 뒤의 것은 오래 된 것, 구조적인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 출현하고 있다. 바이러스 2개가 함께 덮치자 미국은 위기에 빠졌다. 치명적인 피해가 확산되고 있다.

인종차별, 경찰폭력처럼 코비드-19의 희생자도 흑인이 압도적인 비율이다. 질병이야말로 인종차별적이다. 흑인이 전체 인구의 6%인 위스컨신 주에서는 코비드-19 사망자의 50%가 흑인이었다. 인구의 30%가 흑인인 시카고는 사망자의 70%가 흑인. 흑백 사망율의 차이가 캔사스 주에서는 흑인이 7배, 수도 워싱턴은 6배 더 높다고 이 문제를 보도한 영국의 가디언지는 전한다.

‘보건 불평등’은 지난 수십 년, 수 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것이다. 놀랄 일이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흑백의 구조적인 불평등은 가난의 대물림, 빈곤의 악순환을 낳았다. 경제의 불평등은 건강의 불평등을 불러왔다. 지금 같은 때 극명하게 드러날 뿐이다. 흑인뿐 아니다.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치인 저소득 라티노 이민자나 나바호 원주민도 같은 형편이다. 경제가 취약하면 위생도 취약해진다. 경제적 약자는 어느 분야에서건 약자인 것이 고도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의 약점이다. 취약계층의 필수업종 종사 비율은 타 그룹에 비해 현저히 높다. 필수업종이 아니라고 하면 더 문제다. 하루 벌어야 하루 먹고 살 수 있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백인과 흑인이 받고 있는 의료 서비스는 질의 차이도 크다고 관련 보고서들은 전한다. 흑인은 비만, 당뇨, 호흡기질환, 심장질환 같은 기저질환이 가장 높은 인종집단으로 조사됐다. 코비드-19 확산과 사망률이 인종별로 왜 이렇게 차이가 큰 지 여러 곳에서 질문이 제기됐다. 연방 보건복지부는 명확하게 통계로 나와 있는 한 가지, 흑인은 기저질환이 많다는 이유를 댔다. 궁색했다.

시위대 때문에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한때 백악관 지하벙커로 피신하기도 했다고 한다. 백악관 건너 공원에서 평화적인 시위가 이뤄지고 있을 때 교회 앞에서 성경을 들고 찍은 사진 한 장을 원했던 대통령. 싸구려 정치적 제스처를 위해 최루탄을 쏴 길을 내고, 성경과 교회를 파는 것은 역겹다.

대통령은 무자비한 공권력 남용부터 질타했어야 한다. 반복되는 경찰 폭력의 근절책을 제시했어야 했다. 법과 질서를 말하기 전에 치유와 애도, 화해와 통합을 호소하는 것이 순서였다.

하지만 대통령의 입에서는 이런 말부터 나왔다. “약탈이 시작되면 총격이 시작될 것” “ 백악관으로 난입했으면 군견과 무기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5.18 때 한국의 신군부도 아니고, 양식있는 미국인이라면 대통령의 이런 말에 혀를 찼을 것이다.

시위사태는 시시각각 바뀌고 있다. 10분짜리 셀폰 비디오가 모든 것을 말해줬다. 18년차 백인 경찰은 동년배 흑인을 8분46초간 무릎으로 찍어 눌러 숨지게 했다. 폭력 경찰은 살인혐의로 미네소타 주의 맥시멈 시큐리티 감옥에 갇혀있다.

이번 시위는 흑인만의 시위가 아니다. 인종차별과 경찰의 잔혹행위에 분노하는 것이 어찌 특정 인종만의 일이겠는가. 사건이 일어난 미니애폴리스나 동부 쪽 도시들을 보면 백인 등 많은 타인종 주민들도 시위에 가세하고 있다.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시위대에 연대감을 표하는 시위진압 경찰과 주 방위군도 있다. 인종에 관계없이 미국인들이 경찰폭력과 인종차별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약탈과 방화, 폭력이다. 기성 사회체제에 반감이 큰 시위대가 순간 약탈자로 변모하기도 하겠지만, 전문 약탈꾼들이 시위대에 섞여있다. 지난 31일 오후 2시께 폭스 TV 화면에 잡힌 샌타모니카 다운타운의 한 광경. 약탈자들이 레크리에이션 용품업체인 REI를 깨고 침입하려고 했을 때 젊은 여성이 혼자 이를 막아섰다. 다행히 약탈은 막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이런 여성이 혼자라는 점이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화된 힘’이 더해졌더라면 시위의 차원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끌어낼 수 있는 공감의 폭이 훨씬 넓고 깊었을 것이다. 약탈자들이 시위를 선동하고, 날뛰게 버려둘 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는 의식있는 시민들이 조직적으로 나서야 한다. 한국의 촛불 시위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를 미국의 시위를 보면 절감하게 된다.

역사의 물꼬는 군중의 직접 무력인 시위를 통해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1960년대 민권운동 이후 미국에서는 시위를 통한 사회 변혁과 진보의 맥은 끊겼다. 시위는 약탈과 방화, 진압과 상처만 반복되고 있다. 흑인 청년들의 들끓는 분노와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절규는 허공에 사라지고 있다. 약탈자는 일반 미국인, 공권력의 적이 아니라 우선 시위대의 적이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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