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칸 영화제는 결국 무산되었다. 버추얼 페스티벌은 절대 없을 거라 단언했던 칸 영화제로서는 코로나19 팬데믹에 백기를 들 수 밖에 없다. 2차대전 종전 이후 창립된 칸 영화제는 72회의 명성을 이어온 세계인의 영화 축제다. 1948년과 1950년 예산 문제로 무산됐고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으로 중단된 적은 있지만 ‘영화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봐야한다’는 철칙으로 오프라인 영화제를 고수했다. 그런 칸 영화제의 소신도 바이러스 확산이 ‘멈춤’ 상태로 만든 극장산업의 회복을 앞당기기는 역부족이었다. 영화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코로나 이후 칸 영화제 무산이 ‘2020년’만으로 국한될 수 있을까. 영화제가 열려도 레드카펫의 환호성이나 객석의 기립박수는 당분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뉴 노멀 시대의 극장 산업은 새로운 일상이 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박스오피스 매출이 코로나 이전의 절반 수준 회복도 힘겹다. 여름방학 특수를 노리던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1~2년 후로 극장 개봉을 연기했고, 할리웃의 제작 중단 사태는 10만 명의 실업자를 양산한 채 촬영재개가 안개 속이다. 메이저 영화사들이 코로나19 팬데믹에서 TV·영화 제작을 진행, 재개한 국가들을 벤치마킹하고 있지만 개인주의보다는 국가적 연대를 중시하는 민족성까지 도입할 수 있을까.
넷플릭스의 최고 콘텐츠책임자 테드 사란도스는 한국과 아이슬란드, 스웨덴에서 자체 프로토콜에 따라 영상물을 제작 중이라며 한국을 모범사례로 들었다. 우선 모든 제작진과 출연진이 정기적으로 체온을 잰다. 제작 현장에는 손소독제와 마스크 등을 준비해둔다. 일회용 메이컵 도구를 사용하고 뷔페식이 아닌 개인용 도시락을 제공한다.
누구든 감염이 의심되면 방역당국의 권고에 따라 즉시 코로나 19 테스트를 받고 제작 과정을 ‘중지’한다. 촬영장에는 꼭 필요한 출연진 및 제작진의 출입만을 허용하고 출퇴근시 승차 공유를 제한한다. 해외 촬영은 일정을 재조정하고 다수의 엑스트라가 출연하는 장면 등은 특수효과를 활용하거나 ‘대본 수정’을 감행한다. 국가 봉쇄 없이 효과적인 코로나19 대응을 해낸 보건 선진국의 방역지침에 따른 촬영장 자율 통제다. 지난 주 해외촬영을 재개한 아이슬란드의 제작 가이드라인은 더욱 국가 통제적이다.
현재 의무화된 입국자 14일 자가격리 공간을 집에서 호텔과 촬영장으로 완화한다. 매일 아침 출근 전 체온을 재고 2미터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팀을 구성한다. 방문객의 세트장 출입은 금지하고 출연진은 스스로 옷을 입고 마이크를 달아야 한다. 배우당 메이컵과 헤어스타일리스트를 지정하고 친밀한 접촉장면 촬영은 피하며 배우에게 거부할 권리를 행사하게 한다.
배우조합(SAG-AFTRA)과 감독조합(DGA)을 포함한 할리웃 노조들이 제작현장 프로토콜을 만들고 있지만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목숨만큼 중시하는 미국으로서는 요원한 촬영장 재개다. 황당해도 미항공우주국(NASA)과 손잡고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영화를 찍겠다는 배우 탐 크루즈의 프로젝트가 실행이 빠를지 모른다.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도 NASA는 5월27일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우주비행사를 태운 스페이스X의 팰콘9 로켓을 국제 우주정거장으로 발사할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이 우주선 왕복에 성공하면 일론 머스크의 우주탐사기업 스페이스X가 소유한 7인승 유인 캡슐 ‘크루 드래곤’을 타고 탐 크루즈가 우주에 도달해 ‘액션’을 외치게 된다.
1968년에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라는 공상과학영화의 주인공에 불과했던 인공지능(AI) 컴퓨터 ‘할’을 흔히 만나는 세상을 살고 있지 않는가. 호텔업계가 너도나도 도입하는 AI 로봇의 언택트 서비스를 제작현장에 정착시키면 모를까.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대면 접촉이 두려운 뉴 노멀에서는 촬영장만 오면 공황장애를 일으키는 배우들로 넘쳐날 것이다. 간혹 오작동 하거나 갑자기 얼음 상태가 되는 로봇 버틀러지만 월 2,000달러 임대료로 ‘무병’(Virus Free)을 누리는 안도감보다 나은 건 없다.
알렉사나 시리, 구글 어시스턴트와 대화를 나누고 음악과 영화, 내 위치까지 공유하는 우리에게 코로나19가 감염 경로 추적까지 받게 한다. 행여나 추적 불가가 감지되면 AI 할의 메시지가 뜰 것이다. “대화는 이제 무의미합니다, 굿바이~”. 국가적 연대보다 개인을 앞세워 세상과 차단되기 보다는 일상생활의 잠정중단, 14일간의 자가격리 등 코로나바이러스로 알게 된 고립의 불편함이 더 나은 선택이다. 정통성 고수가 필요하고 사생활 보호도 중요하다. 그러나 아직도 끝나지 않은 팬데믹 세상에서는 ‘인류 공동의 선’을 기준으로 행동하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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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