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하순 어느 날 스티븐 밀러 백악관 선임고문과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자들이 비공개 전화 컨퍼런스를 가졌다. 바로 직전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해 발표한 파격적이고 다소 급진적인 이민 일시중단 행정명령이 이날 컨퍼런스의 핵심 이슈였다. 이 자리에서 밀러 선임고문은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의 트럼프 이민정책을 시사하는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새 행정명령은 미국사회에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변화를 불러오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해 시작된 미국사회의 변화는 내가 지난 수년간 추진해왔던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달 22일 서명해 다음날인 23일 오후 11시59분 발효된 이 행정명령은 코로나19 사태를 이유로 미국 이민을 60일간 일시 중단한다는 것이다. 이민 신청자들에게 60일간 신규 영주권을 발급하지 않겠다는 것이 골자이다.
하지만 이 행정명령에는 미국에 거주하면서 영주권을 신청하는 이민자들이나 취업비자 등 단기 비이민비자, 코로나바이러스 관련 연구진과 의료진, 투자이민, 미국 시민의 배우자와 21세 미만 자녀 등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60일간 임시로 취해진 조치여서 이를 ‘미국사회 변화의 시작’이라는 밀러 고문의 지적은 과장된 정치적 제스처로 해석될 수 있었다. 당시 지지자들도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미국사회 변화의 시작’이라는 발언에 선뜻 수긍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해외에서 이민비자를 신청하는 이민자들에 한해 이민절차를 일시적으로, 그것도 60일간 중단하겠다는 조치가 미국사회에 과연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그러나 밀러 고문이 이어간 다음 발언은 그와 백악관이 감추고 있는 암수가 무엇인지를 슬쩍 드러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이민노동자의 유입통로를 차단시키는 것(turn off the faucet)이다. 우리는 연이은 추가 조치들을 검토하고 있다”
60일간 이민을 제한하는 행정명령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며, 연이어 나오게 될 조치들은 미국의 이민제도뿐 아니라 미국사회를 광범위하고 장기적으로 변화시키게 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 팬데믹을 이유로 발동한 이민제한 행정명령이 미국 이민제도를 송두리째 바꾸면서 미국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서막이 될 것을 암시한 셈이다.
지난 3월15일부터 4월18일까지 약 1개월간 미 전국에서 실업수당을 신청한 미국인이 이미 2,650만명을 넘겨 대공황 이후 최대를 기록할 정도이고, 많은 트럼프 지지자들의 이민중단 요구가 그간 백악관에 빗발치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번 조치는 지지층을 달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같은 일련의 발언을 한 당사자가 바로 밀러 선임고문이어서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다.
그가 누구인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온갖 초강경 이민정책의 배후이자 설계자로 지목된 실세 중의 실세 아니던가. 트럼프 취임 이후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던 무슬림 국가 출신의 입국 금지에서부터 난민 수용인원 축소, 불법체류 이민자가족 분리수용 정책을 모두 주도한 인물이 밀러 고문이었으며, 이번 이민제한 행정명령도 그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밀러의 이날 발언은 그간 반발에 부딪쳐 결국은 접거나 포기해야 했던 수많은 과격하고 극단적인 반이민 정책들을 밀어붙이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어서 가볍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큰 변화가 예상되는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의 달라질 패러다임도 그에게는 우호적인 정치적 환경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대공황 시기를 압도하는 실업과 불황의 늪이라는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글로벌리즘의 세계화 정신이 시들고 부상하게 될 자국우선주의의 고립주의는 밀러의 반이민주의에 날개를 달아줄 가능성이 충분하다.
대학시절부터 다문화주의를 혐오하고 백인민족주의자란 비판을 받아온 밀러 고문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어떤 극단적이고 과격한 반이민 설계를 내놓게 될 지 두렵고 걱정스럽다.
“내 조카가 이 나라에서 우리 가족의 삶의 기초를 거부하는 이민정책 설계자가 된 것을 실망과 공포 속에 지켜보고 있다” 밀러 고문의 삼촌인 데이비드 글로서가 했던 말이다. 밀러 가족은 20세기 초 러시아제국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온 이민자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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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목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