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건너편에는 딸아이가 흐느끼고 있었다. 내과 병동에서 일하고 있는 딸아이는 필라델피아에도 코비드-19 바이러스 환자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고 의료 인력은 절대 부족하며, 환자들은 가족들과 격리되어 외롭게 죽어가고 있어 극도의 공포 속에서 지낸다고 호소하였다. 뉴욕의 사촌 여동생과도 연락을 해보았다. 뉴욕시의 한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그녀는 심장과 의사 생활 동안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고 했다. 일손이 모자라 본인이 직접 환자의 호흡기까지 다루어야하는데 많은 환자들이 ‘급성호흡곤란 증후군’(ARDS)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코비드19 바이러스는 ACE2라는 단백질이 많은 조직에 잘 붙는데 폐 조직 중에서도 제일 끝부분인 폐포에 그 단백질이 많기 때문에 바이러스는 인체 깊이 침투한다. 사람의 세포에 붙은 바이러스는 마치 트로이 목마처럼 슬그머니 세포의 안으로 들어가서 증식한 후 급기야 세포를 파괴하고 옆에 있는 세포로 옮겨 같은 일을 반복한다.
허파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폐포는 작은 풍선처럼 생겼으며 막이 매우 얇고 모세혈관과 맞닿아있어 몸 안으로 산소공급을 원활하게 해주도록 만들어졌다. 이 얇고 섬세한 막이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으면 막이 상하면서 붓게 되고 염증이 생겨 고름과 끈적끈적한 가래가 생기게 된다. 심하게 되면 폐포 안의 공기에서 혈액으로 산소 공급이 안 되어 온 몸이 산소 부족에 빠지게 된다. 이 일련의 산소 부족현상으로 죽게 되는 것이 ‘급성호흡곤란 증후군’이다.
폐포와 모세혈관 사이의 염증이 없어지려면 2-3주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동안 인공호흡기를 달아서 환자에게 산소 공급을 해주어야 한다. 고농도의 산소를 공급해주어도 폐에서 산소를 흡수하지 못할 경우에는 체외막산소공급(ECMO) 치료를 해야 한다.
혈관을 통해 환자의 혈액을 몸 밖으로 빼어낸 다음 기계로 혈액 속에 산소를 직접 넣고 이산화탄소는 제거하여 다시 환자의 몸속으로 넣어주는 방법이다.
사촌 여동생과 대화를 마치고 무거운 마음을 추스르려고 하는데, 아뿔싸! 병원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돌봐달라고 전화가 왔다. 호흡곤란으로 병원에 들어온 투석환자였다.
코비드19 의심 환자였다.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를 하는데 마스크는 조여오고 얼굴 보호대까지 하니 숨이 막히기도 하고 불안하여 숨도 잘 안 쉬어졌다.
환자는 약이 투여되는 주렁주렁 달린 여러 개의 줄에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고 산소호흡기가 대신 숨을 쉬어주고 있었다. 나는 투석치료를 해주느라 환자의 몸에 줄을 더 달아야만 했다. 병실 구석에서 돌아서서 손을 씻는데 작은 거울에 비친 줄을 주렁주렁 달고 살아있는 환자의 모습이나 살기위해 여러 개를 뒤집어 쓴 나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미션’이란 1986년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카톨릭 예수회 신부 가브리엘은 선임자를 이어 원주민 과라니족 선교를 결심한다. 그는 숲속에서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연주하여 과라니 족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고 부족의 일원이 되어 산 카를로스라는 선교 마을을 건설해간다.
그 근처 아순시온에는 원주민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넘기는 로드리고 멘도자가 있었다. 그는 동생과 애인의 불륜을 목격하고 결투 끝에 동생을 죽이고 만다. 멘도자는 죄책감에 시달려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을 기다린다. 그러던 중 가브리엘 신부가 선교 마을에서 봉사하며 죄를 씻기를 권하고 제안을 받아들인 멘도자는 가브리엘을 따라 나선다. 칼과 갑옷과 각종 무거운 짐과 물건들을 매고 이과수 폭포 옆벽을 따라 기어 올라가는 멘도자에게 신부는 가볍게 하고 오라고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이다. 떨어지면 다시 끌며 폭포의 맨 위에 오른 멘도자는 기진맥진하여 주저앉는다.
기다리고 있던 과라니 족은 그가 노예 사냥꾼인 것을 알아차리고 칼을 들이댄다. 그러나 신부와 같이 온 것을 보자 그의 목을 겨냥하지 않고 가지고 온 짐을 끊어 버린다. 폭포 밑으로 떨어지는 짐을 보면서 멘도자는 아까운 물건과 함께 불필요한 욕심, 자신만을 사랑했던 어리석은 자신, 후회스러운 과거, 무거웠던 죄짐을 떨어버림과 동시에 용서받음에 대한 감사, 새로움에 대한 환희로 통곡의 눈물을 터트리고 과라니 족은 웃음으로 화답한다. 멘도자는 달고 다녔던 무거운 짐의 줄을 끊어내고 비로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
주렁주렁 줄에 달려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환자를 보면서 생각해본다. 죽음 앞에 섰을 때 필요한 것과 죽음 후에 남는 것은 무엇이며, 그 다음에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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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내과의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