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가능하면 늘 새로운 길로 다니기를 좋아했다. 집을 가는 길도 여러 갈래로 알아놓고 하루하루 다른 길을 굳이 택하기도 했고, 혹시라도 가던 길에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소를 즐기거나 어린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놀고 있는 무리가 보이면 가던 길을 뒤로 하고 다른 길로 돌아가기를 택하곤 했다.
당시에는 그냥 싫어서라는 이유 외에는 왜 굳이 다른 길을 택해 멀리 돌아다니는 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
평화봉사단으로 80년대 초에 한국을 찾은 미국 친구가 있었다. 평소에 늘 밝고 한국사람을 좋아하는 친구였는데 가끔 길을 가다가 난데없이 얼굴이 상기되면서 “한국사람이 너무 싫고 따라가서 때려주고 싶다”는 말을 할 때가 있었다. 너무도 갑자기 변하는 모습이 이상해 그 이유를 조용히 물어보았다.
그 당시 너무도 유명해서 누구나 흥얼거리고 다니던 “헬로 미스터 몽키”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백인인 자신의 모습을 비유해 놀리는 것이라며 그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남자아이들을 질색하며 싫어하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그냥 유행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란 생각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그 친구는 자신이 지나갈 때면 모르는 척하며 갑자기 ‘몽키’ 노래를 하는 것이 자신을 놀리는 것과 연결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이유를 안 후 신경 써서 보니 분명히 그 친구가 지나갈 때면 갑자기 흥얼거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려서 골목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무리와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 무리를 피해 다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놀다가도 내가 지나가면 모르는 척하며 갑자기 내가 다리를 저는 모양을 흉내를 내며 걷고 있었고, 할머니들은 갑자기 “쯧쯧”대고 혀를 차며 내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목을 돌려 주시하는 것이 너무도 싫어서 늘 미리 피하려고 노력했고 멀리 돌아다니기를 마다치 않았던 것이었다.
당연히 이제는 한국에서는 미국인을 봐도 그냥 지나가고, 미국에서는 장애인을 봐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 좀 편해지긴 했다.
한국에서는 장애인 등록제가 있고 신체적으로나 지적인 장애의 정도에 따라 장애등급이 주어지고 그에 따라 나라에서 정한 복지 혜택이 일률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지적장애를 동반한 발달장애의 경우는 리저널 센터를 통해 평생 개개인에게 ‘필요한’ 도움을 개별적으로 결정해 도와주지만 시각장애, 청각장애, 지체장애인 경우는 장애의 유무가 스스로 일을 하고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개별적으로 결정이 되고 필요한 도움은 스스로 정부나 복지기관을 찾아 요구하여 받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갓 온 사람 중에는 장애인 천국으로 알려진 미국에서 장애인 파킹 외에는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게 하나도 없다고 불평 아닌 불평을 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신체적 장애를 장애로 정의하지 않고, 스스로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의 자유로움 정도로 정의하는 것이 합리적이란 생각이 든다. 내 스스로 잘 살아가는데 장애인이라 하는 것도 그렇고,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까지 일괄적으로 혜택을 주기보다는 좀 더 필요한 사람에게 더 많은 도움이 가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
김효선 칼스테이트 LA 특수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