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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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로우나의 포스터

2020-04-11 (토)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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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순간 소름이 쫘악 끼친다. 세상에 … .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공립 사립 불문 모든 학교와 교회 그리고 극장, 영화관, 당구장 등 모든 유흥장의 개장과 집회를 추후 재통지가 있을 때까지 전면금지합니다. 10명 이상의 모든 집회는 금지됩니다. - 시장, 서덜랜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 팬데믹으로 전 세계에서 10일 현재 근 160만명 확진에 9만5,000여명이 사망했다. 지금 다시 사용해도 문구 하나 바꿀 필요 없는 이 포스터는, 그러니까 102년 전 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나흘 앞둔 1918년 11월7일, 캐나다 밴쿠버 인근의 켈로우나 시에서 붙였던 것이다.


당시 5억 명이나 감염돼 수천 만명이 사망한 끔찍한 스페인 독감이 확산되는 걸 필사적으로 막기 위한 것이었다. 100년이 더 지났음에도 인류는 과연 그동안 뭘 했길래 유사한 재앙에 지금 이렇게 속수무책 당하고 있을까.

지난 1세기 인류는 엄청난 과학적 진보를 이뤘다며 자화자찬해 왔다. 호모사피엔스가 20만년 전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상상의 날개를 펼 수밖에 없었던 38만Km 상공의 달을 정복한 것도 이미 50여년 전이고, 5억6,000만 Km 밖의 붉은 별 화성에 우주선이 착륙한 것도 44년 전이다.

지구촌 방방곡곡은 5G 초고속 인터넷망으로 연결돼 가고,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 기반 딥 러닝, 클라우드 컴퓨팅, 무인 자동차 등의 첨단기술의 속속 개발로 바야흐로 5차 산업혁명의 만개를 목전에 둔 오늘날이었다.

의료기술은 또 어떤가. 수십년 간 불치병으로 여겨졌던 에이즈도 만성질환 정도로 길들여 놨음은 물론, 인류를 끝까지 괴롭히는 마지막 넘사벽 질환인 암도 환부만 타깃으로 삼아 주변장기에 대한 손상 부작용 없이 치료하는 방사선 정밀 조사기술이 현실화 되었다.

이로 인해 인간이 120세까지 사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장밋빛 전망이 쏟아지고 있고, 배부른 인간은 재력이 준비가 안 된 채 오래 사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가? 하는 투정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종말론적 코로나바이러스 재앙이 100년 전과 아주 유사한 형태로 우릴 덮쳐온 것이다.

아무리 삶이 힘들고 천국이 좋다지만 극심한 고통 속에 시한부 삶을 사는 경우가 아니면 지금 죽어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막강한 군사력과 첨단과학 기술력을 뽐내 온 세계 최강 미국도 도대체 그동안 뭐 하느라 이렇듯 대비가 허술했는지 도대체가 이해 불가이다. 미국은 10일 현재 확진자 근 49만명에 사망자 1만8천명으로 지구전체에서 국가별 하루 최다 사망 기록도, 최다 감염의 불명예도 동시에 뒤집어쓰고 있다.


특히 뉴욕 일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은 가히 의료시스템의 붕괴라 할 정도의 목불인견의 대 참사다. 세계 초일류 선진 강대국을 자처해온 미국이 이런 비상사태에 대한 대비가 전혀 안된 채 맥없이 당하고 있는 것은 수모에 가까운 일이다.

우리 동네에서도 드디어 돌도 씹어 삼킬 왕성한 나이인 17세의 고등학생이 저 세상으로 갔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어느덧 시니어 대열에 들어선 나는 그 소식에 더욱 움츠려 진다. 검정색 도포에 고깔을 눌러쓴 뾰족 턱의 죽음의 사자가 뜰채를 들고 이리저리 수조를 헤집는 듯한 공포감에 나는 최대한 그의 눈에 뜨이지 않으려 바닥에 납작 붙어 눈알만 껌벅껌벅 움직이는 광어요, 도다리 마냥 쫄리는 심경이다.

이렇듯 바이러스 3차 대전의 포성으로 암울한 이 전장, 죽고 나면 미안할 필요도 안쓰러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면 그만일 삶의 막다른 정거장에서도 서로를 진심으로 염려하며 안부를 묻고, 마스크도 선뜻 나누어 주는 아름다운 보시의 정신은 늪지의 진흙 속에 도도히 피어난 한 송이 연꽃처럼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 준다.

우리가 비록 은행에 많은 잔고를 쌓아 놓지는 못했지만, 이렇듯 가슴이 따스한 이들이 주변에 있는 한 우리는 인생을 멋있게 살아온 것이다. 코로나의 덫에 걸려 불운하게 내일 죽게 돼도 어쩔 도리가 없지만, 그런 일이 현실이 되기 전에 사랑하는 이들과 목소리라도 서로 들을 수 있게 전화로나마 인사를 나누어야 할 거 같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해줘 고마웠다고… 그러나 최대한 잘 버텨 함께 살아내자고.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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