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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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려나간 젊음

2020-04-11 (토)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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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대의 대법관이 70대 동료 대법관과 걸어가던 중 젊은 여성이 지나가자 “아, 지나간 나의 70대여!”라고 동료를 부러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맞다. 90대는 70대를 부러워하고, 70대는 50대, 50대는 20대, 이렇게 우리는 젊음을 그리워한다. 화창한 봄날 지나가는 젊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들떠야 한다. 그래야 아직 늙은이가 아닌 것이다.

며칠 전 넷플릭스에서 2014년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을 보았다. 비상한 두뇌를 가졌던 영국의 수학자, 물리학자인 알란 튜링의 기막힌 삶을 그린 영화다.

2차 대전이 터지자 대학교수였던 튜링은 군 정보팀에 차출되어 누구도 풀지 못할 것으로 알려진 나치 독일군 암호를 해독하여 수많은 연합군 병사들을 구했으며 결과적으로 전쟁 승리에 일조했다.


하지만 종전 후 그는 동성애자임이 밝혀져 체포된다. 당시 영국은 동성애가 불법이었다. 에스트로젠으로 동성애를 치료하라는 판사의 명령으로 여성호르몬을 복용하다가 심한 절망감, 우울증에 빠진 그는 40세도 안된 나이에 독물을 삼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공포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런 와중에도 자살을 생각하는 우울증 환자들이 있다. 영화를 보던 내내 20도 채 안된 꽃다운 나이에 자살로 세상을 등진 환자가 떠올랐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이미 우수한 대학의 입학허가서를 받고 미래의 물리학자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있었다. 며칠 밤을 뒤척이다 가족들에게 자기가 동성애자임을 알렸다. 벽장 속에서 뛰쳐나와 당당히 자기의 정체성을 밝히는 커밍아웃이었다.

평소 여자친구도 없고 행동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막상 그의 말을 듣고 난 부모와 가족들은 슬픔, 분노, 혼란에 빠졌다. 대학진학을 6개월 늦추고 그 기간에 정신과의사를 만나보라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당시 나는 수련의를 갓 마친 정신과전문의였다. 막내동생 같은 환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성애에 관한 환자의 신념은 확고했다. 심한 우울증이나 불안증은 보이지 않았는데 6개월 기한을 조금 앞두고 목매어 죽었다. 가정과 사회의 압력에 대한 분노의 표출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정신의학에서 성을 이야기할 때는 보통 3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성 유전자와 성 호르몬의 영향으로 서로 다른 성기의 발달형성과 신체적 구조를 이루는 성(Sex)이다. 즉 객관적으로 보여지는 남녀 모습이다. 둘째, 자신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인식하는 주관적 성(Gender)이다. 이는 성 호르몬이 뇌에 영향을 미치고 또 사회문화적 영향을 받아 남성은 적극적, 공격적이고, 여성은 보호적, 수동적 행동패턴을 보인다. 대부분의 경우 신체적 성과 사회문화적 성은 일치한다. 셋째는 자신이 성적, 정서적, 사회적으로 이끌리는 성에 대해 지향적 성향을 보이는 성(Sexual Orientation)이다. 여기에는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가 포함된다.

고대 그리스문명에서 출세한 나이 든 남자들이 미소년들과 성적관계를 갖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다. 그 후 중세를 거치며 서양 문명권은 기독교 영향으로 이성애를 권장하고 동성애는 철저히 경계하는 사회규범을 마련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프로이드를 중심으로 시작된 정신분석이론은 잠재의식 속에 묻혀있던 동성애를 다시 의식 밖으로 끌어냈다. 프로이드는 남자가 여성을 사랑할 뿐 아니라 남성도 사랑할 수 있다는 동성애론을 강력히 주장했다.

동성애는 선천적인 것일까, 살아가며 학습된 개인적 선택일까? 아직껏 과학적, 학술적 해답은 없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 질문처럼 소모논쟁이 될 수도 있다. 개인의 생각과 가치관의 문제다. 그러니 동성애자들을 우리와 다른 성소수자로 인정하고 길지 않은 지구촌 인생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동료들로 여기자.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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