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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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과 현실 사이

2020-03-04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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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총선을 앞두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 준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는 이번 총선에서 보수야당인 미래통합당이 ‘미래한국당’이라는 위성정당을 통해 비례의석의 대부분을 가져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여론조사 기관이 시뮬레이션을 해본 결과 더불어민주당은 7석, 미래한국당은 25석 정도의 비례의석을 얻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당으로서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이런 위기감은 초초함으로 바뀌고 급기야 “우리도 위성정당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미래한국당을 향해 ‘꼼수 정당’이라고 비판해온 민주당으로서는 위성정당을 추진할 경우 대의와 명분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도 없는 상황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 모습이다.

윤리학에는 곧 발생할 여러 사람의 죽음을 막기 위해 지금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옳은가를 묻는 사유실험이 있다. 트롤리가 레일 위를 달리는 상황을 가정한 질문인 까닭에 흔히 ‘트롤리학(trolleyology)’이라 불리는 이 사유실험은 삶의 순간순간 직면하게 되는 도덕적 딜레마들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그런 딜레마 속에서 대답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더불어민주당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가 현실의 영역임을 상기하는 일이다. 아무리 숭고한 도덕적 가치와 훌륭한 정책적 구상을 지니고 있다 해도 힘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이상론에 그칠 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대한민국 정치를 통해 신물이 날 정도로 목격하고 확인해 온 사실이다.

정치를 지나치게 대의와 명분이라는 우리 속에 가두게 되면 자칫 현실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무기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간혹 더 큰 도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당장의 도덕적 위화감을 넘어서는 선택을 해야 할 경우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라고 생각한다.

4월 총선은 코로나19 변수까지 더해지면서 판세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 여당으로서는 과반은커녕 제1당 지위조차 위태로워 보인다. 보수야당이 비례의석을 기반으로 국회를 장악할 경우 문재인 정권의 남은 2년이 어떨지는 불 보듯 뻔하다. 개혁의 완수는커녕 그동안 어렵사리 이룬 작은 개혁의 성과들까지 유실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앞에는 몇 개의 선택지가 놓여 있다. 비례정당과 완전히 선을 긋게 되면 명분은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제1당 자리는 내주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반대로 독자적인 위성정당을 만들 경우 명분을 잃는 것은 물론 명분을 중시하는 지지층 이탈로 지역구 선거조차 크게 위태로워질 수 있다.

또 다른 옵션은 다른 진보세력과 연합비례정당을 만드는 것인데(정의당은 아직 부정적이다) 이 역시 명분을 버리는 행위인 만큼 지역구 의석 몇 개 정도는 잃을 각오를 해야 하지만 보수야당의 비례의석 독점을 저지하는 효과는 거둘 수 있다. 이 가운데 어떤 선택을 하든 이기는 싸움을 위한 것이 돼야 한다. 특히 명분까지 저버렸는데 아무런 실리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정치를 넘어 역사 앞에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에 들려주고 싶은 것은 ‘송양지인’(宋襄之仁)의 고사다. 춘추전국시대 송나라의 양공이 초군을 공격했다. 강가에 먼저 도착한 송나라 군대는 초군이 늦게 도착해 강을 건너는 것을 보았다. 이에 참모 목이가 공격의 기회라며 공격명령을 요구했으나 양공은 ‘인의’를 내세우며 듣지 않았다.

초군은 강을 건너 전열 정비를 시작했다. 목이가 참다못해 다시 공격을 진언했지만 “전쟁도 정정당당해야 한다”는 양공의 묵살만 돌아올 뿐이었다. 상대가 전열을 가다듬자 양공은 공격명령을 내렸다. 결과는 송나라의 참패. 양공은 이때 입은 부상이 악화돼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양공의 대부 자어가 탄식했다. “싸움은 이기는 게 목적이다. 이렇게 될 바에야 처음부터 노예가 되는 게 낫지 않았던가.” 후세 사람들은 양공을 의로운 사람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어리석은 패자로 남았을 뿐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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