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 지휘와 오페라 지휘는 크게 다르다. 교향곡이나 협주곡을 지휘할 때는 오케스트라와 청중에만 집중하면 되지만, 오페라를 지휘할 때는 극의 진행에 따라 가수들의 상황까지 배려해야하기 때문이다.
무대 아래 피트에 선 지휘자가 무대 위 공연자들의 동선, 노래, 연기, 춤, 조명, 무대장치에 따른 상황까지 잘 살피지 않으면 음악과 드라마가 따로 놀게 돼 공연이 부자연스러워질 수 있다. 음악 외적인 부분까지 오페라의 모든 요소를 꿰뚫고 있어야 전체를 총괄할 수 있기 때문에 보통 지휘자가 오페라 한 작품을 공부하는 데는 1년 정도, 오케스트라와 가수들과의 연습에만 4~6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모든 지휘자가 오페라 지휘를 잘할 수 있는 건 아닌 이유가 그 때문이다.
최근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음악감독에 임명돼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김은선(39)이 지난달 22일 도니제티의 ‘로베르토 데브뢰’(Roberto Devereux)로 LA오페라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LA타임스를 비롯해 수많은 음악매체 비평가들은 김은선의 지휘에 대해 인상적, 예외적, 자신만만, 에너제틱, 드러매틱, 매끄러운, 균형잡힌, 뛰어난, 세련된, 정확하고 섬세한 등의 미사여구를 동원해 칭찬 일색의 평을 내보냈다.
김은선은 정말 돋보였다. 오케스트라 피트에 선 지휘자를 많이 봐왔지만 김은선 만큼 열정적으로 무대와 소통하며 공연을 이끌어가는 지휘자는 본 적이 없다. 크고 확실한 제스처, 자신감 넘치는 바톤 테크닉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가수들과 눈을 맞추며 연주했고, 정확한 템포와 부드러운 강약 조절로 오케스트라 소리를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벨칸토 오페라의 매력을 최대한 살려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너무나 명쾌하게 큐를 주는 지휘자, 가수와 연주자의 호흡을 모두 최대한 배려하는 지휘자였다.
김은선에게 반한 건 작년 9월 할리웃 보울 데뷔 연주에서부터였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라벨의 피아노 콘첼토(장이브 티보데 협연), 라흐마니노프의 ‘심포닉 댄스’가 레퍼토리였는데 김은선은 마치 춤을 추듯 그 다양한 리듬을 완전히 체화하여 듣는 사람의 몸이 박자를 타고 흔들릴 정도로 리드미컬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는 오페라뿐 아니라 콘서트 지휘에서도 최고 수준이었다.
작년 12월초 그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발탁됐을 때 세계적인 뉴스가 된 것은 최초의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주요 오페라하우스의 음악감독 중에는 여성이 없다. 그런데 아시안 여성이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오페라단의 수장이 되었으니 파격이라 불릴만했다.
클래식 음악계의 보수성은 유명하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지휘계에서 여자는 전체 10%가량을 차지하지만 음악감독은 고사하고 포디엄에 오르는 기회를 잡기도 쉽지 않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여성 지휘자의 숫자는 정계, 재계, 학계, 다른 장르의 예술계를 포함한 어떤 분야의 여성 진출과 비교해도 현저하게 적다. 이제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요 몇 년 사이 세상이 변하고 있다. 유리천정이 아니라 철옹성 같았던 포디엄에서 여성의 모습을 보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마린 알솝, 시몬 영, 제인 글로버, 바바라 해니건 같은 이들이 선구자들이고 한국 출신 중에는 여자경, 성시연, 장한나가 활약 중이다.
LA필하모닉은 유난히 여성 지휘자에게 개방적이다. 2012년 두다멜 장학생(Dudamel Fellow)이던 미르가 그라치니테 틸라를 2년 후 보조지휘자로, 다음해에는 부지휘자로 임명했고 그는 이듬해 영국 시티 오브 버밍햄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초빙돼 떠나갔다.
LA필의 현재 수석객원지휘자는 수잔나 말키(헬싱키 필하모닉 수석지휘자)로, 2017년 임명 당시 이 자리를 맡은 최초의 여성이었다. LA필은 또한 이번 시즌 프로그램에서도 여러 명의 여지휘자들을 초청했다. 말키는 물론 엠마누엘 아임, 카렌 카멘세크, 카리나 카넬라키스, 나탈리 스터츠만 등이 그들이다.
김은선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의 할머니는 1912년생이신데 ‘여의사’로 불렸다. 하지만 의학을 공부한 누구나 그저 ‘의사’로 불리는 시대를 보실 수 있었다. ‘여성 음악감독’이 되어서 감사하지만 다음 세대는 그저 ‘지휘자’로 불릴 수 있는 미래를 기대한다.” 다음 세대가 아니라 그녀 세대에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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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