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다로 간 트럼프

2020-02-27 (목)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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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화요일인 3월3일은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 예비선거의 날이다. 민주당 대선후보 레이스에서 누가 승자가 될지가 전국적인 관심사다. 캘리포니아의 대통령 선거는 이것으로 끝. 본선보다 여덟 달 앞서 막을 내리게 된다. 그 후로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11월 본선에서 공화당이 선거인단을 한 명이라도 확보할 가능성은 0%. 공화당이 포기한 캘리포니아는 ‘민주(당)공화국’이다. 민주당 일당 독재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일당 독주’는 맞다. 말이 좀 심하다고 느껴진다면 다음의 숫자들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482개 시 중에서 민주당 강세 시는 359개, 민주당 유권자가 공화당의 2배 이상인 곳이 207개 시에 이른다. 전체 유권자는 민주당 44%, 무당파 27%, 공화당 24%로 공화당은 제3당이다.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대학촌인 버클리는 등록유권자 35명 중에 공화당은 한 명꼴이다.

주 의회로 눈을 돌리면 ‘캘리포니아 민주(당)공화국’의 실상은 더 적나라하다. 주하원 80석 가운데 민주 61, 공화 18, 독립당 한 석, 주상원은 전체 40석 중에서 민주 29, 공화 10, 공석1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민주당이 절대 다수인 3분의2를 넘어, 4분의3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니 공화당은 민주당의 견제세력이 될 수가 없다. 민주당의 동의가 없으면 공화당 의원이 주 의회에서 할 수 있는 유의미한 입법활동은 어렵다고 봐야 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무슨 결의안이나 통과시킨다면 모를까. 주지사로부터 주정부 고위공직자는 물론, LA카운티 수퍼바이저 5명, LA 시의원 15명 중에도 공화당은 한 명도 없다. 캘리포니아에서 민주당은 무소불위의 정치세력을 이루고 있다. 민주당 자체 내에서 견제가 이뤄지지 않는 한 민주당 독주를 막을 길이 없다.


절대 권력은 어디서나 문제를 일으키는 법. 지난 2014년 10월 LA 다운타운의 디즈니 콘서트홀에서는 케빈 드 리온 의원의 주 상원의장 취임식이 열렸다. 이 라티노 민주당 실세의 행사에는 2,000여명이 참석하고 마리아치 악단과 한인 무용단의 축하공연도 벌어졌다. 5만여 달러가 든 이 행사를 주최한 가주 라티노 입법 코커스에는 전화회사와 정유사 등 주의회와 이해관계가 걸린 많은 기업과 단체로부터 기부금이 답지했다. 일부 주 상원의원의 부패 스캔들이 불거져 나온 때여서 이 호사는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주 상원의장? 그 자리는 선서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무슨 취임식도 아니고, 대관식을 하는 것 같군요”라는 것이 비판의 요체였다.

설마 이런 정치적인 지형 때문에 캘리포니아를 등질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다. 지난 2007~2016년 캘리포니아를 떠난 100만 명 중에는 정치적 상황이 이유인 경우도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로 이주한 일부 주민들은 이렇게 말한다.

“캘리포니아는 살기에는 너무 비싸고, 정치는 완전히 내 손을 벗어났다. 공화당은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는 정치적 자유에 제한을 받는다고 느꼈다. 트럼프를 찍었어도 일터에 가서는 아닌 척 해야 했다.”

오렌지카운티에서 캔사스 시티로 이사한 한 주민은 “여기선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다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아서 좋다.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졌을 때 남가주에서는 갖지 못했던 느낌”이라고 말했다.

캘리포니아 민주당은 내부적으로 보면 크게 둘로 나뉜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을 중심으로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 민주당과 라티노 민주당이 곧 그것이다.

남가주 한인사회는 지역적으로 라티노 민주당이 주도하는 정치권에 속해 있다. “이념적으로 민주당이 소수민족을 위한다고 해서 지지하는 사람이 많지만 문제는 라티노 민주당에서 한인은 ‘그들의 마이너리티’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인들도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르나 특히 자영업 종사자들은 LA시나 카운티, 주 의회에서 통과되는 일들을 보면 한인들의 입장이나 이해와는 거리가 먼 일들만 벌어진다는 걸 절감하고 있다.

일부 정치인의 독점과 전횡을 막기 위해 임기 제한제가 도입됐지만 직업 정치꾼들은 주와 카운티, 시의 선출직을 돌면서 정치판을 누비고 있다. 임기 제한제의 정신은 실종되고, 실효성은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주 의원에 출마했던 한 한인은 “한국보다 못하지 않아요. 이른바 실세에게 밉보이면 의사당의 방 배정부터 구석으로 밀어 넣고 차별하더라구요.”라고 그가 경험한 정치현장 소식을 전했다.

공화당은 캘리포니아에서는 설 땅이 없어서 일까. LA의 한 선착장에 갔더니 요트의 돛대에 트럼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지난 주 베벌리힐스에 와서 캠페인 실탄을 걷어간 트럼프는 잠은 라스베가스로 옮겨 그의 소유 리조트에서 잤다고 한다. 트럼프가 캘리포니아에서는 바다 위가 아니면 갈 곳이 없는 것인지, 요트에 휘날리는 트럼프 깃발이 은유적으로 보였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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