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생충’의 음악

2020-02-18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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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을 지금까지 열한번 보았다. 물론 영화관에서 본 것은 한번이고, 나머지는 집에서 다운받아 본 것이다. 작년 10월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 이미 다섯 번쯤 본 후였는데, 한 친구가 그건 아무 것도 아니라며 “미키 리라는 사람은 열두번이나 보았다더라”고 했다.

그때는 미키 리가 누군지, 왜 그렇게 많이 봤는지 알지 못했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오스카 작품상 시상식에서 멋진 수상소감 전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고, 여러 기사를 통해 한국과 할리웃의 영화산업을 선도한 대단한 인물인 것도 알게 되었다. “봉준호 감독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니, 아마 지금쯤은 열두번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이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기생충’을 그렇게나 많이 보았다고 하면 다들 놀라면서 왜 그랬냐고 묻는다. 왜냐고? 당연히 너무 재미있어서지.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신선하고 짜릿한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만장일치로 받았으니 당연히 대단한 영화일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역작이었다. 특이하고 독창적인 스토리, 끝까지 예측 불가능한 사건 전개, 누구에게나 신랄한 블랙 유머,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상쾌한 장면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두시간 동안 정신없이 빠져들게 했다.


신기한 것은 아무리 여러번 보아도 그 재미와 감상이 처음과 똑같더라는 것이다. 대개 좋은 영화들은 다시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고 안보이던 것이 보이고 더 많은 것이 이해되는데 ‘기생충’은 그렇지 않았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보니 워낙 완벽한 영화라서 그런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감독이 전체를 자기 틀에 정밀하게 짜넣고 한 장면 한 장면을 만든 다음, 그걸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한 미장센 영화라 다른 해석이나 상징의 여지가 없다는 얘기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석이며 인디언, 모르스부호 등에 대해 많은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봉 감독은 자기가 만든 모든 장면을 통해 하고 싶은 말,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다 보여주었고, 관객은 단 한번의 관람으로 그걸 충분히 흡수하게 된다. 아카데미 회원들에게도 그렇게 투명하게 전달되어 결국은 작품상이라는 쾌거를 이룬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열한번이나 보고 나서 유난히 인상적으로 뇌리에 남아있는 것이 있다. 바로 음악이다. 스토리는 물론이고 대사까지 다 외운 상태에서 ‘기생충’을 떠올릴 때면 자동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이 음악이다. 영화 장면들과 붙어서 귓전에 계속 따라다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음악이 별로 주목받지 못했고, 음악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사실은 그 잔잔한 음악들이 굉장히 긴밀하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심각하거나 드러매틱하거나 웅장한 음악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가볍고 우아하면서도 살짝 비틀어진 느낌을 주는 바로크 음악을 기본으로 하여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등 현악 앙상블이 사람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코믹하고 경쾌하고 세밀하게 표현한다.

‘기생충’ OST를 찾아보니 무려 24곡이나 된다. 반지하 창가에 양말이 걸려있는 오프닝 장면에서 시작해 엔딩 부분까지 제목들만 나열해보아도 스토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첫 번째 알선, 부잣집 가는 길, 매실청, 윤기사와 박사장, 믿음의 벨트, 떠나는 문광, 야영, 짜파구리, 유령, 기택의 전두엽, 물바다, 또 물바다, 일요일 아침, 피와 칼, 야산, 이사…. 관객이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장면마다 수많은 음악이 녹아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수록된 ‘소주 한 잔’이 오스카 주제가상 예비후보에 올라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봉준호 작사의 이 노래는 실상 영화에는 한번도 나오지 않고 엔딩 크레딧이 한참 올라간 후에야 나오는데다 영화 분위기와 동떨어지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

장면마다 적재적소에서 긴장감 있게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이 음악들을 누가 만들었나 찾아보니 정재일이란 젊은 작곡가 혼자서 다 작곡한 것으로 나온다. 봉준호 감독이 ‘지구상에서 가장 섬세한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정재일은 세살에 피아노를 시작해 열살 때 기타를 잡고 중학교 때 영화 OST 세션으로 일했던 천재 음악인으로 꼽힌다. 봉 감독과 ‘옥자’에 이어 두 번째 호흡을 맞춘 ‘기생충’에서 그는 이상하고 다양한 장르적 색깔을 한 방향으로 엮는 장치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계단처럼 이뤄진 선율”을 사용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다시 들어보니 정말 하나씩 음계를 오르다가 한순간 후루룩 미끌어지곤 하는 선율의 요동이 흥미롭다.

화면에 감정과 드라마를 불어넣어주는 게 음악이다. 이런 음악들이 없었으면 ‘기생충’이 얼마나 심심했을까. 음악에도 박수를 보내주자.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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