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가을 서울 지하철에서 일어난 일이다. 오후 시간, 승객이 제법 많았던 지하철은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었고, 나는 창 밖에 보이는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큰소리로 제게 소리쳐 물었다. “스님! 어디 가세요?”
돌아보니 이제 막 유치원 다닐 정도 되는 예쁜 여자 아이였는데, 엄마 손을 꼭 잡고 크고 맑은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 아이는 “스님! 지금 어디 가시냐고요?”하고 더 큰 소리로 묻는다. 그러자 아이의 어머니가 “얘야, 스님께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하며 아이의 입을 막고 죄송하다며 인사를 했다.
지하철에 있던 사람들은 나와 그 아이에게 시선이 쏠렸고, 순간 그 아이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디로 가는지 잊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어디를 가며, 여기에 왜 있는 것이지?’
주변 모든 것이 정적에 쌓였고, 그 무엇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내려야 할 곳을 잊고 한참을 지나 종착역이 되어서야 그 고요함에서 깨어났다.
당시 난 시골 산속 암자에서 서울의 사찰에 오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주변 환경은 많은 집과, 아파트, 학교, 그리고 큰 대로가 있었던 보통 도시 주변의 풍경들이었다.
매일 아침 차창 밖으로 이 풍경을 신기하게 보곤 했는데, 항상 이른 시간부터 무수히 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쏟아져 나와 어디론가 분주히 가는 모습을 보며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딜 그리 바삐 가는 거지?’ 라는 생각을 했다. 다들 무슨 일들이 있기에 그렇게 열심히, 바삐 어디론가 가고 오는 것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일을 ‘업(業)’이라고 표현한다. ‘업’이란 산스크리트어 카르마(Karma)를 번역한 말로 ‘무엇을 짓다’ 혹은 ‘만들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업’이란 본래 행동 혹은 행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다른 행동을 일으키는 원인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것에 의해 일어난 결과가 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닌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는 행위를 업이라 부르고 그 결과에 대해선 과보 또는 업보라고 표현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 대부분 바쁘고, 지친 일상 속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한다. 그렇게 쉬고 싶으면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 일은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일을 끝내면 된다. 일을 끝내야 쉴 수가 있다. 그 일 즉 그 ‘업’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언제 일을 끝낼 수 있을까?
자작자수(自作自受)라는 말이 있다. 그 일들 모두 나로 인해 생겨났고, 내가 지은 것들이며 그러기에 내가 받아야 하고,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나로 인해 일어난 일들은 그 원인에 대한 결과도 내가 받아야 한다. 그러기에 그 일은 내가 해결해야 하고, 누가 대신 해 줄 수도 없는 것들이다.
살면서 마음을 일으키고, 행동하고, 살아가고, 사라지는 이러한 과정을 무수히 반복 한다.
짧게는 순간, 길게는 평생 그렇게 일어나고 사라짐의 연속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나와 당신 우리가 그렇게 쉼 없이 반복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일을 마치고, 일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며 걸림 없는 수행자의 생활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맺어놓은 수많은 인연들로 인해 그리 하지 못하고 있다.
놓아버리고 끊어 버리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한 이를 불가(佛家)에선 대장부(大丈夫)라고 한다. 언젠가 이런 대장부 되어 보길 권한다. 마침내 자신의 일을 끝내고, 모두가 한가하고, 자유롭고, 평화롭길 두손 모아 빈다.
오늘, 또 어디 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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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향 스님/ 뉴저지 원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