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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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효율의 늪

2020-02-06 (목)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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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례 노숙자 카운트가 지난 1월 21~23일 LA카운티 전역에서 실시됐다. 수천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지역별로 나눠 홈리스 수를 전수조사 했다. 결과는 조만간 발표되겠지만 적어도 피부로 느끼기에는 LA의 노숙인이 지난해보다 줄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보다 앞서 지난 1월초에는 88가와 버몬트, 사우스 LA에서 한 아파트의 준공식이 있었다. 시장 등 유력 지역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 아파트는 지난 2016년 노숙자 주택 마련을 위한 LA시 주민발의안 HHH가 통과된 뒤 첫 결과물이었다. 노숙자용 주택 1만 유닛을 짓기 위한 12억 달러 공채발행안이 통과됐지만 3년여가 지난 후 겨우 62 유닛짜리 아파트 하나가 처음 지어진 것이다.

대학원 졸업 후 첫 직장으로 노숙자와 저소득층 주거지 건축 전문 비영리기관을 택했던 그레이스 조(27) 씨를 만났다. 젊은 세대의 눈으로 본 노숙자 대책의 현장소식을 듣고 싶어서였다. UCLA를 졸업한 그는 미시건 대학 대학원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한 후 LA에 있는 이 기관에 입사했다. LA 다운타운에 저소득층 아파트 24동을 지은 이곳에서 1년반 동안 일하면서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우선 일반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저소득층 주택은 일반 주택보다 건설단가가 훨씬 높았다고 한다. 정부지원금은 지역경제 전반에 두루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한 예를 들면 인건비는 노조가 정한 기준 이상을 주게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400평방피트짜리 스튜디오 하나를 짓는데 55만 달러가 들었다. 웬만한 곳에 번듯한 단독주택 한 채를 지을 수 있는 돈이다.

예산을 타내고, 사용하는 규정은 엄청 까다로웠다. 기금이 연방, 주, 카운티 어디서 나오느냐에 따라 가이드라인이 다 달랐다. 일일이 규정에 맞춰 일하기가 여간 복잡한 게 아니었다. 전문인력은 그 만큼 더 필요했다. 대표적인 연방프로그램인 LIHTC(Low Income Housing Tax Credit)의 경우 공사비가 정부에서 바로 지원되는 게 아니었다. 먼저 공사발주처에서 IRS에 공사비의 세금면제 신청을 한 후, 승인이 되면 이 택스크레딧을 은행에 팔고, 은행이 돈을 내주는 식으로 일이 진행됐다.

그는 5,000만 달러의 예산으로 98유닛의 6층 스튜디오를 짓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대부분 업무가 융자를 받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LA시로부터 190만 달러를 지원받아 세운 한인타운 시니어 센터만 해도 제출한 서류가 어른 한뼘 높이였다고 들었다. 5,000만 달러 프로젝트가 오죽했을까.

그레이스 조 씨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요약하면 ‘노숙인과 저소득층 아파트 건설은 공사비와 금융비용이 엄청 비쌀 뿐 아니라 과정은 지극히 비효율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경험담을 전하면서 무척 조심스러워 했다. 다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잘못 전하는 것은 아닌가 해서였다. 사려 깊은 젊은이의 당연한 우려로 보였지만 그의 체험담은 LA시 감사관실의 감사결과와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발표된 시의 자체감사는 주민발의안 HHH가 통과됐으나 노숙자 사태의 시급성에 비해 문제해결을 위한 실행노력은 지지부진 하다고 지적했다. 노숙자용 주거 한 유닛 건설에 코리아타운/피코 유니온 지역은 70만 달러 이상이 든다고도 보고서는 밝혔다.

LA의 노숙자 대책을 보면 미국사회가 비효율의 늪에 빠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문제는 드러났는데 자체 치유능력은 상실한 사회, 대표적인 문명의 말기증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의료서비스가 필요할 때는 물론, 일상생활 곳곳에서 이런 비효율의 수렁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레이스 조 씨는 대학졸업 후 평화봉사단과 유사한 국가 주도의 자원봉사기관인 아메리코(AmeriCorps)에 참여해, 1년간 한인타운 한 초등학교에서 저소득 학생들의 방과 후 학습을 지도한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이 컸다고 한다. 도시계획을 전공해 이쪽 일을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웃을 돕는 게 마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직장경험이 그의 꿈에 현실감을 더해 줬다. 그는 지난달 직장을 옮겨 한 주류은행에서 저소득층 주택의 펀딩 일을 시작했다. 전에 하던 업무의 다음 단계 일이어서 이 분야의 지식과 경험의 폭이 더 넓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가 절감한 것은 이제 노숙자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동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부가 나서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일을 계기로 정부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이번 대선 민주당 경선후보 중에서는 엘리자베스 워런을 지지한다고 했다. 공약이 현실과 거리가 있지 않느냐고 묻자, 현실이 절망적이라고 해서 꿈까지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워런은 오는 3월 캘리포니아 경선에서 확실한 한표는 확보해 놓은 것 같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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