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독이 유럽을 휩쓸던 15세기에 영국에서는 이 병을 ‘프랑스 두창’이라 불렀다. 프랑스에서는 ‘독일 병’으로 불렀으며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인들은 매독에 ‘나폴리 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본에서는 ‘중국 병’이었다.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대부분의 사회는 그 위험을 타자와 연관시키는 반응을 보인다. 타자는 다른 나라이기도 하고 한 사회 내의 비주류 집단이 되기도 한다.
이런 반응은 먼 과거와 현재가 전혀 다르지 않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과 증오는 희생양 찾기와 타자 비난의 가장 흔한 형태이다. 사회심리학자 헬렌 조페는 이것을 ‘타자의 논리’라 부른다. 그러면서 이 논리에는 위험을 야기하는 건 언제나 타자이며 그런 만큼 위험에 대해서는 내가 아닌 타자가 비난받아야 한다는 일관된 생각이 관통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 2015년 세계보건기구(WHO)가 신종 감염병을 명명할 때 지리적 위치나 사람의 이름, 직업이나 과도한 공포를 유발하는 용어 등을 배제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은 타자의 논리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막아보자는 취지의 조치였다. 하지만 최근 전 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을 보도하고 있는 일부 한국 언론은 이런 지침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우한 폐렴’으로 부르기를 고집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지구촌에 비상이 걸렸다. 걱정과 두려움이 뒤덮고 있다. 최근 한국의 한 TV 뉴스를 봤더니 50분 방송시간 중 거의 40분을 코로나바이러스 관련 뉴스로 채우고 있었다. 이쯤 되면 겁먹지 않을 도리가 없다.
비상상황에서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며 결코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필요하다면 격리와 입국제한 등 강력한 조치도 취해야 한다. 하지만 이를 다루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도를 넘어선 느낌이다. ‘참사’ 등 실제상황을 과장하고 공포를 자극하는 표현들을 서슴지 않는다. 일부 정치인들 또한 여기에 편승하고 있다.
이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빠르게 번지고 있는 가짜 뉴스들이다. 온갖 가짜뉴스와 헛소문 등이 소셜미디어 등을 타고 마구 퍼져나가고 있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공포를 증폭시키고 현명한 대응을 어렵게 만든다. 백신전문가인 하이디 라슨 박사가 ‘네이처’ 기고를 통해 “소셜미디어를 지구촌 공공보건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혐오 민감성과 정치적 성향 사이의 밀접한 관계이다. 이 같은 사실은 많은 연구들에서 일관성 있게 확인되고 있다. 특히 병원균에 대한 우려가 클수록 외국인들에 대한 불신, 그리고 전통가치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더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심지어 병원균 혐오 정도를 측정하면 어떻게 투표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다는 보고도 있다. 실제로 지난 2008년 대선 당시 2만5,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감염에 대한 걱정이 큰 유권자들일수록 공화당 후보인 존 매케인에 압도적인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연구결과들로 볼 때 이민자들에 대해 전혀 우호적이지 않은 트럼프 대통령이 ‘세균 혐오자’라는 것은 하나도 놀랍지 않다. 트럼프가 자기 입으로 밝힌 사실이다. 그는 누가 자기 물건 만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인간의 성향은 쉬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트럼프가 입으로는 어떤 말을 하든지 이민자들에 대한 그의 속내가 우호적으로 바뀌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확산되자 일부 정치인들과 언론은 호재를 만난 듯 공포와 혐오를 확산시키는데 골몰하고 있다. 이들의 행태는 아주 영리해 보인다. 타자를 향한 두려움을 퍼뜨려 이에 쉬 자극받는 유권자들을 결집시키는 것은 당파적 이익을 도모하는 데 대단히 효과적인 전략이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 못지않게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이보다 훨씬 확산속도가 빠르고 감염 확률이 큰 ‘포비아’ 바이러스다. 지금 우리가 갖춰야 할 것은 이런 공포와 혐오의 바이러스로부터 생각을 지켜줄 ‘머릿속의 마스크’이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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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