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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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의 집

2020-01-30 (목)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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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우씨는 1가구 2주택자이다. 집이 LA에 한 채, 롱비치 쇼어라인 선착장에 또 한 채가 있다. 롱비치 집은 선상가옥인 요트. 한 달에 반 이상을 여기서 산다고 한다. LA 한인타운 인근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도 주말이면 내려와 선상생활에 합류한다.

요트에는 주방과 침실, 식탁 등 가재도구와 샤워시설 등이 두루 갖춰져 있다. 사용하는 선착장(dock) 크기에 따라 월 400~700여 달러의 사용료를 내는데, 여기에는 물과 전기, 와이파이 등 유틸리티와 파킹랏의 주차비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일년 내내 배에서 생활하려면 별도 퍼밋이 필요한데 쿼타가 한정돼 있다.

선착장에는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독특한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다. 롱비치 쇼어라인 마리나는 요트와 보트 주인 2,000여 명이 주민이다. 이웃 간의 내왕도 정겨워 보인다. 파티 등 크고 작은 모임과 미니 콘서트도 열린다. 돛에다 영상을 쏘면 가라오케로도 훌륭하다.


남진우 씨네 클래식 세일링 요트 이그나텔라 호는 1988년생. 지난 2011년 매릴랜드에서 9만 달러에 구입했다. 운송비 등을 더하면 태평양 연안에 안착시키는데 11만 달러가 들었다. 높이 44 피트, 길이 37피트, 폭 12피트로 선체 무게는 2만 3,000파운드.

세일링 요트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배로 아래쪽에 킬(keel)이라고 불리는 무거운 중심추가 달려 있어 무게 중심을 밑으로 확 끌어 내린다. 그래서 모터보트보다 파도에 뒤집힐 염려가 적고, 뒤집힌다 해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복원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선장 남진우 씨는 이그나텔라 호를 타고 시애틀을 다녀왔다. 바닷길 왕복 3,000마일. 지난 2018년 3월31일 출발해 70일이 걸렸다. 산타 바바라까지는 아내와 함께 갔지만 그 후는 단독항해였다. 산타 바바라를 지나 산타 마리아로 가면서 대륙이 꺾어지는 지점인 포인트 콘셉션을 지나면 완전히 다른 바다가 된다고 한다. 같은 태평양이라도 이때부터는 본격적인 대양에 들어서게 된다.

장기운항을 하려면 세일링 요트는 두 사람이 해야 한다. 한 사람이 조종간을 잡으면, 다른 사람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돛 3개를 조정해야 한다. 하지만 시애틀 왕복은 거의 단독항해여서 다음 기항지까지 밤을 새며 달려야 했다. 사나운 밤바다, 집채만 한 파도에 뱃전이 전쟁터로 변하고 기진맥진한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기항지인 어촌에서 경험한 순박한 미국 시골인심은 큰 위로가 됐다.

이그나텔라 호는 순풍을 만나면 바람과 조류의 힘으로 최대 시속 8~9노트까지 나가지만 시애틀 행 때 불어온 바람은 대부분 북풍. 이같은 역풍을 맞으면 지그재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인생살이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남가주는 대부분 아침에 바람이 자고, 오후가 되면 일어난다.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바람은 대략 6개 정도의 이름으로 불린다. 바람에 따라 돛을 조절해 주어야 하는데, 돛에 바람을 받은 후 바람이 빠져 나갈 길을 내주는 게 요트 운행의 기본 원리.

남 선장의 이력은 좀 독특하다. 지난 79년 고교 졸업 후 바로 미국에 온 그는 부모의 마켓 일을 돕다 20년 동안 생업을 위해 갖가지 비즈니스를 했다. 그러다 38살에 4년제 미술대학인 라구나비치의 라구나 칼리지 오브 아트 앤 디자인(LCAD)에 입학해 늦깎이 미술학도가 됐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 한동안 개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화가와 건축가를 꿈꾸기도 했다.


물과는 14년 전 첫 인연을 맺었다. 처음에는 낚시에 취미를 붙여 3년 반은 낚싯배를 탔다. 그러다가 스튜디오에서 카약부터 만들어 봤다. 인터넷을 뒤지니 배 만드는 법이 다 나와 있었다. 작은 돛단배인 딩기(Dinghy)도 만들어 탔다. 재미있었다. 그 꿈이 요트로 발전했다.

그는 주변에서 흔히 보던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요트를 하는 한인은 워낙 한정돼 있다. 불쑥 미국사회에 들어가 배우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지난 2014년에는 한인 요트클럽도 시도해 봤지만 여러 이유로 잘 안됐다고 한다. 요트는 기본적으로 진지하게 배우려는 마음과, 시간과 정신여유가 있어야 도전할 수 있는 분야라고 한다.

선상생활의 맛은 계절에 따라 다르다. 요즘 같은 겨울에는 비라도 내리면 운치가 그만이다. 산과 바다가 서로 끌어당기듯 눈을 이고 서있는 샌개브리엘 마운틴은 육지에서보다 더 가깝게 다가온다. 그는 알음알음 유료 항만운항이나, 카탈리나 1박2일 트레이닝 트립 등도 하고 있다지만 그게 이런 생활을 택한 목적은 아니다.

“크게 집착하지 않고, 아옹다옹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어 이런 라이프를 택했어요. 바다에서는 요트, 육지에서는 RV를 타고 돌아다니며 사는 게 꿈입니다.”

내일 일을 크게 걱정하지 않고 홀가분하고 단순하게 사는 미니멀리즘. 그게 추구하고 싶은 삶이라고 했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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