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서커스

2020-01-28 (화) 정숙희 논설위원
작게 크게
다섯 살 무렵의 일이다. 평소 나를 예뻐하던 ‘식모언니’가 좋은 옷을 입히고 머리를 묶어주더니 나를 데리고 나섰다. 시장가나보다 하고 따라나섰는데 웬일인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이곳저곳 들르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종일 끌려 다니다 날이 어두워졌고 어린 나는 졸음을 못 이겨 어느 집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 후 다급하게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보니 문 밖에 우리식구들이 서있었고, 엄마가 나를 화들짝 끌어안고 택시에 태우더니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땐 몰랐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그 언니가 나를 서커스단에 팔아넘기려 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뒤늦게 아이가 없어진걸 알고 온 동네와 시장통을 수소문하고 찾아다닌 끝에 꽤 멀리 떨어진 그 집까지 찾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60년대 한국사회는 어린아이를 잃어버리는 일이 드물지 않던 시대였다. 고의로 납치되거나 사람 많은 데서 부모 손을 놓쳐 길 잃은 아이들이 서커스단으로 팔려간다는 이야기가 종종 있었다. 당시 한국에 서커스단이 그렇게 많았는지, 실제 그런 일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그런 괴담은 아이들을 겁주기에 충분했다.


동네에 서커스단이 오면 들뜨고 흥분하면서도 천막 뒤에서 아이들이 학대당하며 곡예를 익힌다거나, 집도 부모형제도 없이 고달픈 유랑생활을 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무섭기만 했다. 펠리니 감독의 ‘길’(La Strada 1954) 같은 영화를 통해 굳어진 비참한 이미지가 더 많았겠지만 아무튼 곡예단이라 하면 가장 평범하지 않은 인생의 장면들이 연상되곤 했다.

하지만 지금 21세기에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면 다들 기절을 할 것이다. 현대의 서커스는 그런 이미지와는 정반대, 거대 기업이고 전문 공연예술이며 선망의 대상인 쇼 프로덕션이다. 가장 유명한 예가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다. 지난 35년간 세계 450개 도시에서 1억8,000만명이 관람했다는 ‘태양의 서커스’는 베스트셀러 ‘초일류 브랜드 100’에서 애플, 구글, 아마존 등과 함께 나란히 소개되었다. 창립자 기 랄리베르테(Guy Laliberte)는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500대 갑부에 포함됐고, 할리웃 명성의 거리에 별을 새겼으며, 타임지의 세계 영향력 있는 100인(2004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곡예사들은 어린 시절 잡혀가고 팔려가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과 오디션을 거쳐 선정되고, 떠돌이 유랑곡예단이 아니라 전세계를 유람하는 월드투어를 한다. 전 직원이 4,000명, 무대에 서는 아티스트만 1,300여명에 달하는데,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이들은 모두 체조, 육상, 수영 부문에서 국가대표선수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다. 현재 ‘태양의 서커스’에서 활약하는 한인 단원 5명 중에는 싱크로나이즈드 국가대표선수 출신 홍연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선수였던 박소연이 포함돼있다.

곡예라는 점에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 그것은 창의성과 디자인, 그리고 음악과 드라마를 접목한 새로운 차원의 무대예술 창조였다. 기 랄리베르테는 캐나다 몬트리올 거리에서 불을 뿜고 저글링을 하던 곡예사였다.
1984년 그가 거리에서 발굴한 공연자들과 함께 동물 없이 사람만 나오는 서커스를 만들었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자유와 창의성이다. 거기에 화려하고 대담한 디자인, 스토리가 있는 드러매틱 연출이 더해져 마법의 특별한 환상을 빚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몬트리올 본사에서는 300여명의 의상전문가들이 일체의 의상과 신발, 소품 및 특수효과를 직접 만들고, 모든 연기자들의 두상을 떠서 꼭 맞는 가면과 모자를 제작한다. 피부에 직접 닿는 의상과 신발은 최고급 소재만을 사용하고, 모든 천은 일관된 컬러 유지를 위해 흰색 원단을 구입해 본사에서 직접 염색한다니, 그 완벽을 향한 철저함에 놀라게 된다.

태양의 서커스의 41번째 프로덕션 ‘볼타’(VOLTA)가 남가주를 찾아왔다. 지난주부터 다저스태디엄에 세운 ‘빅탑’ 텐트에서 3월8일까지, 그 다음 한 달간은 OC 페어&이벤트 센터에서 공연된다. ‘볼타’는 서커스의 기본과 오리지널에 충실한 작품이다. 과도한 장비와 테크닉 없이도 인간 육체가 보여줄 수 있는 아크로바틱의 한계를 현란하고 아름답게 펼쳐 보인다.

그런데 태양의 서커스를 볼 때마다 나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아슬아슬하고 기막힌 곡예가 아니라 가수가 라이브로 들려주는 음악이다. 단조 띤 구성진 노래에서 느껴지는 애수와 아픔, 집시의 한이 서린 듯 유랑곡예단의 고달픈 인생이 담긴 듯 묘하게 이국적인 곡조에는 오래전 서커스 텐트에서 맡았던 냄새, 그 페이소스가 어려 있다. 어린 시절 해질녘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혼돈과 슬픔이 함께 밀려온다.

<정숙희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