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감사하다”고 했다. 그는 말 그대로 청천벽력 같았던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사람이다. “두 손이 있어 감사하고, 젊은 여자가 아니라 나이 70이 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져 감사하다”고 말했다.
가든그로브의 이영희 씨. 지난해 6월 12일 오후 5시30분께, 그녀는 아파트 앞에 세워진 차 옆에 서 있었다. 그때 건너편 아파트에서 나온 차가 쏜살같이 달려들어 뒤에서 들이받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고현장은 참혹했다. 현장을 본 남편 이명복(73) 씨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아내의 두 다리가 잘려나가 길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긴급 출동한 응급차는 두 사람을 모두 UCI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15일쯤 후에야 의식이 돌아왔다. 깨어보니 다리가 없었다. 머리도 다치고, 왼쪽 팔은 부러졌고, 이빨 몇 개도 날아갔다. 왜 내가 여기 누워 있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처음 깨어났을 때 발버둥 칠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는 말이 ‘나는 걱정 말고 당신이나 잘 챙겨요. 손발이 다 없는 사람도 있는데-. 당신이 잘 견뎌야 해요’ 하더라고요. 내가 할 말이 없었어요.” 남편 이명복 씨는 당시를 이렇게 전했다.
이들 부부는 여전히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지 그러셨느냐고 하자 “사고 당시의 일은 물론 그날 하루 일은 까맣게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뇌의 망각 기능이 지우개처럼 그 끔찍한 기억들을 말끔히 지워버린 것이다. 정말 고맙게도.
다리는 허벅지 위 깊숙한 곳에서 잘려 나갔다. 의족을 하기도 어려운 부분이라고 한다. 그는 침대 위에 앉아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나마 한쪽 허벅지에 인공뼈를 붙여 무게중심을 아래로 잡아 놓은 덕분에 늘 누워서 지내야 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사고를 낸 후 도주하다 체포됐다는 30대 용의자는 약물을 복용한 DUI 상태였다고 한다.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됐다고 들었을 뿐 교통사고 보상 등 그 뒤 이야기는 아는 게 없다고 남편 이명복 씨는 전한다.
이영희 씨는 사고 반년 뒤인 지난달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동안 UCI와 재활병원 두 곳을 거쳤다.
“여태껏 집사람이 온갖 일을 다 했으니 앞으로는 내가 다 하겠다”고 남편은 다짐하지만 라면 끊이는 것 말고는 음식을 해본 게 없고, 장보기나 빨래 등 집안일 역시 모두 아내가 해왔기에 그의 말대로 ‘임무교대’가 쉬운 게 아니다. 아침은 커피 끓이고 토스트 하면 되지만 나머지는 식당 투고에 의존할 때가 많다. 없어진 다리가 아직도 아프다고 하면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같이 고통스러울 뿐.
샤워 체어나 전동 휠체어, 장애인에게 지원되는 카운티 복지프로그램도 아직 받지 못해 필요한 것은 가족들의 힘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침실이 2층에 있어 침대는 1층 거실에 들여놓았다. 집에 온 후 2층에는 2번 올라갔다 왔는데 그때마다 아들이 업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혼자 밤에 있을 때 울고 그러지 않느냐고 친구가 묻데요, 그러지 않아요, 생활에 불편함은 있죠. 나 땜에 고생하는 식구들에게 미안하구요.”
특히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하지만 평소 스킨 쉽이 없던 아들이 엄마의 손도 잡아주고 하니 그것도 참 고맙다고 했다. TV를 보고 있으면 그동안 잘못 살았다는 후회가 크다. 다리가 성했을 때 식구들이랑 여행도 다니고 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30여 년 페인팅업을 해온 이명복씨는 계절적으로 일감이 없는 때이기도 했지만 아내 간병이 겹쳐 한동안은 거의 일손을 놓고 살았다. 바쁜 생업 중에도 체육회 등 오렌지카운티의 여러 한인단체에서 오래 활동해온 그를 돕기 위해 지역 한인들이 고맙게도 십시일반 정성을 모아 전해 주기도 했다. 날이 풀리면서 일감이 들어오면 그는 새벽부터 일을 나가야 한다. 한동안은 수시로 현장과 집을 오가는 생활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두어 달 전에 만난 뼈암으로 한쪽 팔을 절단한 30대 엄마도 그에게 닥친 일을 감사하다고 했다. 다른 가족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게 감사의 이유 중 하나였다. 두 다리를 잃은 이영희 씨가 말하는 감사의 이유와 서로 말을 맞춘 듯 비슷했다.
지난 연말에는 아주 오랜만에 선배 한분을 뵈었다. 이틀에 한번 신장 투석을 하고 있었다. 한번 투석에 3시간여가 걸리는 힘든 투병생활. 하지만 그는 감사하다고 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성경을 읽는 시간도 되고-.
역경의 바닥에 떨어졌을 때 가능한 위무와 치유는 감사 외에 다른 것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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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