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콜클래식] 하이페츠-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2020-01-17 (금)
이정훈 기자
유명한 협주곡 중에서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가장 야성적이다. 아름답다기보다는 다소 거칠고, 차갑게 들려오기도 하는데 그것이 또한 시벨리우스를 듣는 매력이기도 하다. 마치 0시에 들어야 제맛인 곡이라고나할까. 음악은 애잔하다고하여 꼭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만큼은 가슴 시리는 애수가 마치 겨울 풍경을 전해 주는 것만 같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받고 있는 곡이다. 청소년 시절, 도심의 어떤 상점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함박눈이 내렸다. 밤이었고 어둠 속에서 내리는 눈은 오직 불빛이 비치는 그곳에서만 하얗게 뿌려지고 있었다. 문구점, 옷가게, 과일가게… (한국의) 재래 시장 골목길은 비좁고 지저분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얀 눈이 더욱 아름답게 비쳐졌다. 한적한 곳, 시골길이었다면 오히려 쓸쓸하기만 했을텐데 삶의 온갖 오물을 뒤집어 쓴 듯 그러한 어둡고 지저분한 곳에서 내리는 눈이었기에 더욱 그 명암이 강렬하게 대비되었던 것 같다. 삶 속에서 음악은 늘 그 때 보았던 그 정경 같은 것은 아니었나 싶다. 삶이 힘들고 고달플수록 또 그 조건이 부조리할 수록 그 옆에서 조용히 흐르는 음악은 더욱 아름답게 들려왔고 또 가슴을 후려파도록 사무치는 영혼의 소리로 깊이 뿌리박혔던 것 같다.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약 18년 전 사라 장(장영주)이 이곳 샌프란시스코에 왔을 때 SF 심포니와 함께 연주했던 곡이다. 그러나 이곡은 당시 천재성을 거침없이 발휘해 나가던 한창 나이의 젊은 장영주에게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곡이었다. 신문에서도 혹평했고 또 내 자신이 들어봐도 너무나 영혼이 없는 연주였다. 유튜브에 나와있는 장영주의 연주를 다시한번 들어봤다. 2011년. 그러니까 그로부터 약 10여년이 흐른 뒤, 네델란드 방송 교향악단과의 협연이었는데 무척 성숙한 장영주의 연주를 느낄 수 있는 곡이었다. 소리의 울림도 좋았고 깊이도 좋아졌다. 다만 태생적으로 이곡은 아직도 어딘가 장영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곡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곡이 워낙 차갑기 때문에 왠지 장영주가 소화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선입감(?). 장영주뿐만 아니라 어쩐일인지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만큼은 여지껏 가슴 깊이 와 닿는 느낌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어느날 0시, 좌수아 벨이 들려주던 연주. 그 중에서도 2악장만이 인상 깊이 남아 있었던 것은 그것이 0시라고 하는, 밤의 오싹한 분위기가 함께 했기 때문이었던 같다. 유튜브에 나와있는 좌수아 벨의 연주는 가장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선 소리가 깊다. 레드 바이올린이라고 불리우는 최고의 명기에서 흘러나오는 선명한 음색도 따라올 자가 없을 만큼 벨의 연주를 특정짓고 있지만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하면 뭐니뭐니해도 (그 성격상) 가장 어울리는 소리는 야샤 하이페츠의 연주라고 한다.
외로운 한 마리의 늑대. 역사상 하이페츠만큼 냉혹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바이올리니스트도 없었다고 한다. 테크닉 상으로도 완벽하여 ‘19세기에 파가니니가 있었다면 20세기에는 하이페츠가 있었다’고 할만큼 하이페츠의 명성은 압도적이었다. 1901년 리투아니아의 유대 가문에 태어난 하이페츠는 13살때 이미 베를린 필과 협연할정도로 타고난 신동이었다고 한다.
유튜브에 나와 있는 하이페츠의 시벨리우스 협주곡은 여지껏 들어본 시벨리우스 중에서도 가장 개성있는 연주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조금 과장하면 다소 이기적인 천재들만의 속성이 깃든 연주였다고나할까.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음악, 자연 속에서 고독히 사그러져가는 그런 외로운 늑대와 같은 울부짖음. 시벨리우스를 들으면서 또 그 음악을 연주하면서 아무런 사연을 실어 나를 수 없다면 그것은 연주(음악)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단순히 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그런 상품일 뿐이라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그저 악기를 연주하는 하나의 기술일 뿐이다. 하이페츠의 연주는 악기에 영혼을 담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영혼을 송두리째 빼버린, 냉혹한 기술이며 악기와 일대일로 투쟁하는 고독한 투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다르다면, 그것이 너무 냉혹하기 때문에 오히려 오싹한 한기를 느끼게 하는 묘한 역설이라고나할까. 그것은 오직 가장 피튀기게 싸우는 자만이 포효할 수 있는 야성의 힘이며 또 고독함같기도 했다. 그래서 비평가 칼 플레슈는 ‘역사상 완벽한 연주자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장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하이페츠일 것’이라 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범인에게는 그저 그의 절대 연주 앞에서 한숨밖에 짓지 않을 수 없게 된다.(유튜브에 그의 여러 연주가 나와 있다)
<이정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