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지막 선택

2020-01-03 (금)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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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한테 의사 한번 만나보라고 하세요.” 딸애가 걱정이 되어 아내에게 한 말이었다. 최근의 내 행동들이 좀 염려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날 밤 지금까지 배운 지식을 총동원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검토해 보았다. 문제는 늙음 때문이란 결론을 내렸다. 원래 조심성이 부족한 내가 나이가 들며 순발력도 떨어져 생긴 해프닝 이었다.

70대에 들어서면 가끔 잘 알고 있는 사람 이름이나, 물건의 위치, 매일 주고받는 단어가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곧 기억이 되살아나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으면 비병적((Nonpathological) 노화과정이다.


가까이 지내던 지인 한분이 오랫동안 암으로 고생하다가 숨을 거뒀다, 자식들이 모두 모인 후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에 떠났다. 먼 곳에 사는 자식들이 장례식에 다시 와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어 주기 위해 일부러 2~3일 음식을 먹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분은 마지막 순간을 자신이 선택했다는 만족감으로 미소 지으며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VSED가 무어죠?” 며칠 전 어느 환자가 물어본 말이다. 90이 넘은 아버지가 요즘 자주 하는 말이란다. ‘Voluntarily Stopping Eating and Drinking’은 말 그대로 의도적으로 먹고 마시는 식사를 중단하는 것이다. 10여년 전 자살옹호 단체가 처음 언급한 이래 최근 의학계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치료 방법이 전연 없는 말기 만성질환자들, 암 말기 환자들은 매일 매일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신음한다. 그들 중에는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먹을 수 있고 의식이 있을 때 자신의 최후를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음식이나 액체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는 방법을 택한다. 물론 이런 삶의 마지막 과정은 가족, 보호자, 호스피스 간병인과 충분한 대화를 나눈 뒤 결정해야 한다.

자발적 식사중단 후 생의 마지막이 언제 올 것인가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각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환경적 요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보통 2-3일 내에 사망하지만, 어떤 이들은 2주 이상 견디는 경우도 있다. 음식섭취만 안하면 몇 주간 버틸 수 있다. 수분이 부족한 탈수상태 때문에 일찍 죽게 된다.

VSED은 죽음의 자연스런 과정이지만 심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따르므로 의사의 도움 또한 필요하다. 세상에 굶어 죽는 것만큼 큰 고통은 없다고 한다. 나치가 말을 잘 안 듣는 유태인들을 굶겨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고통이 극에 달하면 먹는 욕망조차 잊어버리고 오히려 황홀감을 느끼게 되므로 죽지 않을 정도로 물을 조금씩 먹여주며 죽였다고 한다.

문제는 말기 암이나 질병이 없는데도 자의적으로 먹고 마시지 않는 죽음의 방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제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에 한번 뿐인 죽음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한다. 또한 말기환자가 6개월 이상 살 수 있는데도 자의적 식사중단을 택하는 경우다. 환자가 자기 결정능력이 있다고 최소 2명의 의사가 판단하면 연방대법원은 그런 사람들의 죽을 권리를 인정해 준다.

자발적 식사중단은 일종의 안락사인가? 그렇지 않다. 죽음이 다가올수록 심한 고통이 따르므로 안락사와는 거리가 멀다. 안락사는 의사에 의한 환자를 위한 선의의 타살이며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 자발적 식사중단은 대부분의 경우 의사가 진통제와 진정제를 처방해 준다. 일종의 자의적 자살이며 의사는 자살을 좀 편안하게 도와주는 사람으로 자살방조죄로 처벌되지 않는다. 이렇게 의사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자살과 타살이 겹쳐진 과정이라는 주장도 있다.

세상 일 미리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삶의 여정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며 살아간다. 좋든 싫든, 잘했든 못했든 선택이 쌓여 가는 여정이 인생이다. 아주 중요한 몇몇의 선택을 제외하고는 선택의 두려움 때문인지 대다수는 별 큰 생각 없이 감성적으로 결정해 버린다.

새해가 되었다. 시작과 끝처럼, 탄생과 죽음 또한 양끝을 연결하는 하나의 선상에 놓여있다. 우리는 우연히 세상에 나왔지만 떠날 때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 한번밖에 없는 죽음에 대한 마지막 선택을 자신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그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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