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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즌, 새로운 시작

2019-10-08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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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0 클래시컬 뮤직 시즌의 시작이 어수선하다. 남가주의 대표적 음악단체 두 곳, LA필과 LA오페라가 동시에 지각변동과도 같은 큰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LA 필하모닉은 지난 9월16일 갑자기 사이먼 우즈 최고경영자가 사임해 음악계를 깜짝 놀래켰다. 우즈는 2018년 1월 부임한 이래 별 문제없이 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아무런 갈등이나 분쟁의 조짐이 없었기에 이 소식은 큰 충격이었다. 더 이상한 것은 그 배경에 대해 지금까지 한마디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LA필은 물론이고 뒷얘기를 시시콜콜 보도하는 LA 타임스도 함구하고 있는 가운데, 시즌 오픈 이틀 전인 지난 1일 새 CEO에 채드 스미스 COO(최고운영책임자)가 선임됐다는 후속 발표가 나오면서 그 내막은 묻히는 모양새다.

행간에서 읽히는 이야기는 사이먼 우즈가 몸에 맞지 않는 큰옷을 입고 버거웠다는 것이다. 그는 2017년 LA필을 떠나 뉴욕 필로 가버린 데보라 보다 회장의 후임으로 왔는데 보다의 그림자가 너무 크고 길게 드리워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은 여장부가 뛰어다닌 17년 동안 LA필은 음악, 재정, 건축에서 도약을 거듭해 세계 정상수준에 올랐기 때문이다. 망치소리가 멈춰버린 디즈니 홀 건축을 다시 일으켜 완성한 것을 비롯해 구스타보 두다멜을 새 음악감독으로 영입했고, 할리웃보울 프로그램의 쇄신으로 안정적 재원을 확보하는 한편 모금의 귀재로서 부임 당시 4,600만달러였던 연 예산을 1억2,500만달러로 불려놓고 떠났다. 현재 LA필은 미국에서 가장 재정이 크고 유일하게 흑자를 내는 오케스트라이며, 팡파르가 대단했던 100주년 프로그램도 모두 보다의 유산이었다.


그녀가 사임했을 때 LA 필에는 2명의 강력한 후보가 있었다. 이번에 CEO가 된 채드 스미스와 당시 회장대행을 맡았던 게일 새무얼이다. 그런데 스미스는 그 자리를 고사했고, 새무얼은 이사회의 선임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 상태에서 외부에서 영입된 우즈는 적응이 힘겨웠던 모양이다. 어느 조직에나 특수한 문화와 분위기가 있는데 규모가 훨씬 작은 시애틀 심포니의 수장이었던 그는 LA필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채드 스미스가 선임되자 LA필 안팎에서 “당연한 선택”이라며 조심스런 축하가 이어지고 있다.

한편 바로 길 건너편 LA 오페라는 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지난 2일 플라시도 도밍고(78) 총감독이 사임을 발표했다. 이미 예상된 수순이었지만 막상 도밍고 ‘퇴출’이 공식화되자 착잡한 분위기가 여실하다. 아울러 내년 2월 ‘로베르토 데브뢰’를 비롯한 향후 모든 공연이 취소됐는데, 그것은 앞으로 미국 내에서 도밍고의 공연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8월 중순 그의 성추행 스캔들이 터지자마자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달라스 오페라가 그와의 공연을 취소한 데 이어 바로 지난 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마저 그를 내침으로써 마지막 보루가 무너져 내린 느낌이다. 메트 오페라는 도밍고가 51년 동안 한 시즌도 빼놓지 않고 공연했던 곳이다. 그리고 바로 지난 주초에는 이번 시즌 개막작인 ‘맥베스’의 주역으로서 드레스리허설까지 진행했었다. 그런데 오프닝 바로 전날 출연이 전격 취소되었고, 다시는 뉴욕 무대에 오르지 않기로 합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제 미국에서 도밍고의 공연은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크나큰 슬픔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나 자신이 바로 얼마 전 그의 성추행을 비난하는 칼럼을 썼지만 막상 거장의 공연을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자 너무나 허전해지면서 지난 10여년 그가 다양한 역할로 변신하며 들려준 아름다운 목소리가 눈과 귀에 어른거린다.

도밍고는 1986년 LA 오페라의 창단을 주도했고, 2003년부터 총감독으로 활약해온 LA오페라의 얼굴이고 정체성이었다. 문화예술계 변방이던 LA의 신생 오페라단이 오늘과 같은 주요 공연단체로 성장한 것은 도밍고의 헌신과 열정, 그리고 그의 명성과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비록 인간적인 결점이 드러나 불명예스럽게 퇴진했지만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 무대에서 31개의 오페라 주역을 맡아 300회 이상 노래하고 100회 이상 지휘한 레전드의 업적과 유산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아직도 목소리가 건재한 도밍고는 앞으로 유럽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미투 운동이 유별나다며 반감을 보이는 유럽 팬들이 오히려 그를 한층 더 지지하고 있고, 유럽 전역에서 그의 공연 스케줄이 올해 말까지 꽉 차있기 때문이다.
LA필과 LA오페라가 모두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새 시즌을 시작했다. 위기를 극복하고 더 나은 공연단체로 진화할 것을 믿는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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