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체되는 ‘라이프사이클’

2019-10-02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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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전 까지만 해도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경우가 희귀했다. 16세기 말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몽테뉴는 “노령으로 죽는 것은 드물고 특이하고 놀라운 현상이며, 다른 죽음의 형태보다 훨씬 부자연스럽다”고 썼다. 나이 들어 죽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질 정도로 노인이 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통과 지식과 역사의 수호자로서 특별한 역할을 수행했다. 죽을 때까지 집안의 우두머리라는 지위와 권위를 유지했으며 그런 만큼 나이 든 사람들에 대한 존경이 두터웠다. 이런 분위기의 영향 탓인지 미국 건국 후 한동안 노인들은 인구조사에서 나이를 밝힐 때 어린 척하기보다는 오히려 실제보다 나이가 더 든 척하곤 했다. 인구학자들이 ‘나이 반올림’이라 부르는 현상이다. 올바른 통계를 위해 이런 거짓말을 바로 잡느라 골머리를 앓아야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노인인구가 점차 늘어나면서부터 이제는 오히려 나이를 깎아 말하려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1790년 미국사회의 65세 이상 인구비율은 2%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는 5,0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5%에 달한다.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비율도 비슷하다. 이 비율이 계속 늘어날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노인인구가 폭발적 늘면서 노인들에 대한 인식은 과거보다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런 경향은 올해 하버드대 학자들이 실시한 편견연구에서도 확인됐다. 연구진은 미국인 440만 명으로부터 모은 광범위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명시적’ 편견과 ‘무의식적’ 편견을 조사했다.

그랬더니 성적인 성향과 인종 등 모든 부문의 편견은 지난 2007년부터 2016년 사이 예외 없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노인은 조금 달랐다. 사회적 시선 때문인지 명시적 편견은 약간 줄었지만 무의식적 편견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노인들에 대한 편견이 가장 완고하다는 얘기다.

최근 AP통신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점차 늘어나는 노인근로자들에 대해 젊은 세대가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음이 확인됐다. 18세에서 49세 사이 응답자의 40%, 특히 18세에서 29세의 44%는 노령 근로인구가 늘고 있는 데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응답했다. 이들은 나이 든 근로자들이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고령화 추세 속에서 일자리 문제가 점차 세대 간 경쟁과 갈등의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노인 편견은 한국에서 훨씬 더 심하다. 젊은 세대는 노인들에 대한 불만과 혐오를 SNS 등을 통해 여과 없이 드러낸다. “노인들과는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고령세대의 가치에 대한 불만이 대부분이지만 급증하는 노인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다는 인식 또한 이런 부정적 태도를 부추기고 있다. 경제는 위축되고 일자리가 필요한 노인들은 급속히 늘면서 세대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노인 혐오’의 확산 속도가 ‘고령화’ 속도를 앞서고 있다는 진단이 나올 정도다. 노인들의 젊은이들을 향한 시선보다 젊은이들의 노인들을 향한 시선이 한층 더 부정적이라는 한 사회학 연구결과도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자신들의 머지않은 모습임에도 얼마나 현실이 팍팍하면 그럴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서로 다른 단계에 있다고 여겨온 노인층과 젊은 층의 라이프사이클이 겹치기 시작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이다. 고령화로 라이프사이클이라는 순환도로에서 차가 잘 빠지지 않으면서 정체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레인을 늘리고 출구도 더 많이 만들면 된다. 하지만 지금 나타나고 있는 라이프사이클의 체증은 일찍이 인류역사에 없었던 초유의 현상이어서 이 문제를 푸는 데 거의 모든 나라들이 애를 먹고 있다. 과도기인 만큼 시간과 중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건 ‘역지사지’의 시각이다. 라이프사이클엔 유턴이 없다. 젊은 세대는 자신들도 머지않아 앞차가 된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노인들에게는 젊은이들의 불안과 고뇌를 헤아려주는 어른스러움이 있어야 한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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