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깨우침의 아침

2019-09-14 (토)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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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무서워서 총을 살 엄두를 못 내겠어. 꼭 한번은 쏘고야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거든.” “그래서 나는 마음을 아주 단단히 먹었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샀지만,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로 총을 쏘지 않겠다고.”

총을 주문한 뒤 3일 만에 배송을 받았고 총은 사격연습장에 갈 때만 집밖으로 가지고 나간다는 친구의 포스팅을 보고 서로 주고받은 댓글이다.

나보다 서너 살 아래 흑인인 그는 실리콘밸리 한동네에서 살며 15년 이상 된 오랜 지기이다. 3년 전쯤 거의 20살 정도 나이가 많은 백인 동성남편이 뇌졸중으로 사망하면서 그는 100만 달러를 호가하는 집을 상속받았다. 그는 그 집을 팔고는 물가나 생활비 부담이 샌프란시스코 지역보다 덜 하다는 라스베가스에 집을 두어 채 사서 훌쩍 이사를 갔다.


“이곳에서 생긴 일은 모두 이곳에 놓고 간다”는 TV 광고도 야릇한 라스베가스에서 한 2년 살았나, 싶었던 그가 요즈음은 새크라멘토에서 직장생활을 한다는 소식과 함께 가끔 아주 재미있는 포스팅을 올려준다. 그러면 나는 한인지인들 보라고 얼른 리-포스팅을 해서 점수를 따는 재미가 솔솔 하다.

팔로알토의 일류 로펌에서 비서로 일하던 몸무게 물경 350 파운드의 엄청나게 비만인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살을 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효과가 없자 약 5년 전 그는 최후의 방법으로 위장에 30cc 정도의 작은 상부 위주머니를 만들어 이를 소장과 직접 연결하는 방법으로 식사량을 강제로 줄여주는 위장관 우회수술을 받았다. 그 결과 기적적으로 220파운드, 나와 비슷한 정도로까지 몸무게를 줄이는데 성공했던 것이었다.

비슷한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차량 블랙박스를 사면 꼭 그걸 돌려봐야 할 사고가 생길지도 몰라” 하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한편으로 느끼면서도 한달 쯤 전 나는 기어코 참지 못해 사고야 말았다.

그런데... 지금 고해상 블랙박스 화면 속에는 차에서 힘없이 체념하며 내린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허망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고 있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인도 쪽으로 터벅터벅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도로변에 걸터앉아 훌쩍이는 소녀 앞에 앉아 체념의 명상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마치 덫에라도 덜컥 걸린 듯, 미처 반사 신경을 발휘해 볼 새도 없이나는 그만 어이없는 사고를 내고 말았던 것이다.

갈 곳 없어 막막하던 중 마지막 순간의 연결로 일본 대기업의 실리콘밸리 혁신센터장인 상냥한 일본여성과의 라운딩 등 두번의 골프와 하이킹으로 노동절 연휴를 기분 좋게 잘 보낸 후 첫 출근 길, 한국의 친구가 올려준 패티 김의 근사한 계절 노래 ‘9월이 오는 소리’를 나지막이 따라 부르며 행복감에 들떠서 룰루 랄라 가던 중 사고는 갑자기 발생한 것이었다.

교차로에서 붉은 신호등에 정차한 뒤 왼쪽에서 달려오는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핸들을 막 오른쪽으로 꺾는 순간이었다. 19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자그마한 히스패닉 처녀가 탄 자전거가 순식간에 횡단보도로 진입해 내 차와 충돌하고 만 것이었다.


소녀가 자전거에서 이탈해 차의 보닛 위로 떨어진 다음 다시 차도로 미끄러져 떨어지던 불과 2~3초 찰나의 슬로우 모션은 마치 한편의 영화라도 보는 듯 어찌 그리 생생하고 천천히 흐르던지….

돈암동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아랫동네나 윗동네 돌산동네에서 급조된 팀과 하루에도 몇 게임씩 하던 축구를 시작으로, 40여년 달리기를 계속해온 나는 나름 건각이 되어 뛰어난 운동신경을 자랑하며 살아왔다.

한국에서 다니던 은행의 직장 체육대회에서 축구시합을 할 때면 30대 중반까지 양발을 모두 쓸 줄 알아야 하는 준족의 부동의 레프트 윙으로 출전하곤 했다.

그만치 운동신경은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며 살아온 나였기에 이런 사고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차에 부딪혀 놀란 소녀는 말할 것도 없고, 순간 나는 “인생을 이렇게 허투루 가벼이 대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겸허한 교훈을 얻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소녀는 놀란 것 말고는 크게 다친 것은 없어 보였다. 소방차와 함께 득달같이 출동한 경찰은 내 설명을 들은 후 차량등록증과 보험증서를 확인하고는 교통사고 접수증 외에는 아무런 교통위반 티켓도 발부하지 않고 ‘가 봐도 좋아요’ 하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더욱 신경을 써서 조심 운전을 할 것이니 더 큰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전화위복이다. 인생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의 발생은 빈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을 터. 매 순간 자만하지 않고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 의미 있는 아침이었다.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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